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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나아도 흉터는 남는다.


BY 낸시 2005-02-10

나는 젊고 싱싱했던 시절의 내 부모를 모른다.
내 기억속의 부모는 중년을 넘어서부터 노년까지다.
얼른 자라 힘을 덜어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늙고 초라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나이들어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어머니는 그리 말했다.
허리가 끊어지도록 아파도 자식들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고...
아버지는 자신이 늙어 노후대책이 필요한 줄도 모르고 자식들 학비를 위해 논이며 밭을 파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부모의 희생으로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여자아이가 아홉이 있었지만 나를 제외하곤 중학교도 졸업한 아이가 없던 가난한 마을이었다.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 돈벌이를 시키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광주리 장수를 하던 울엄마 머리꼭지엔 다른사람보다 유난히 머리털이 성글었다.
광주리 무게에 눌려 빠진 것이다.
어머니를 대신해 광주리를 이고 버스정류장까지 가면서 나는 광주리 무게에 눌린 가슴이 뻐개지는 줄 알았다.
한푼이라도 돈을 더 만들기 위해 어머니는 광주리 무게가 무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곤 하였다.
그렇게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어느 땐 시오리 길을 걸어 버스차비를 아꼈다.
그 때 울엄마 나이 육십 이쪽 저쪽이었는데...
여름 땡볕에 길바닥에 광주리 놓고 앉아 오이, 가지, 깻잎, 호박, 호박잎, 열무, 풋고추,고구마대...,  등, 돈이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 내다 팔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를 들이쉬고 내쉬며 그 때 일원하던 냉차 한그릇 돈 아까워 못마시고 자식들 학비를 위해  아껴 모아야 했다.
잡상인 단속반의 발길에 어머니의 광주리는 전주천 둑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였다.
허튼 웃음 한번 웃지 않던 내어머니의 자존심도 함께 나가 뒹글었다.
모두들 땔감을 연탄으로 바꿀 때도 가난은 늙은 아버지를 산으로 내몰았다.
나이들어 점점 가늘어지는 아버지의 다리가 나뭇짐 지게 밑에서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보였다.
나뭇가지에 긁힌 살갗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피부도 나이가 들면서  약해져 걸핏하면 상처가 났다.


결혼 전 남편과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서로의 부모을 돕기로 약속했다.
약속대로 우리는 시집에 꼬박꼬박 돈을 보냈다.
돈벌어서 뭐할거냐는 동료들의 핀잔을 들을 만큼  검소하고 알뜰하게 절약하며  모은 돈이었다.
친정에 보내는 것에 대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시집과는 같은 경제단위에 속하지만 친정은 다른 것이다.
결국 울부모의 희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된 나는  돈을 벌어 시집에만 보냈다.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내는 시어머니 밥상과 짜디짠 김찌나 장아찌로 이루어진 친정어머니의 초라한 밥상을 보면서 눈물을 참기위해 입술을 꼭 물어야 할 때도 있었다.
울시부모는 친정부모보다 스무살은 젊었는데...
하지만 우리집 경제권은 남편에게 있었다.
자기는 하룻밤 술값으로 한달 월급을 날리고 와도,  옆에 앉아 술 따라 준 아가씨가 이쁘다고 연년생 어린 아이들 떼놓고 맞벌이 하는 아내가 하루종일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팁으로 주고 왔노라고 자랑해도 별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남편도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설날 아침, 남편은 혼자서 제사를 지내는지, 기도를 하는지... 하면서 콧물을 훌쩍였다.
눈에 눈물도 맺혔다.
맏아들 노릇을 못하고 이민 온 자신의 신세가 한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조상의 제사 따윈 안중에 없는 아내가 섭섭해서인지는 모른다.
그런 남편을 보고 소리질렀다.
궁상 떨지 말고, 밥먹고 비행기 표 알아보고 한국으로 가버리라고 하였다.
가서 부모 살아 생전에 물 한그릇이라도 더 떠 주고 오라고 하였다.
부모가 죽고나면 얼마나 내 탓을 하겠느냐며 얼른 가서 실컷 효도하라고 미운소리를 해 주었다.
결혼한 남자는 제 부모에 대한 효도도, 조상에 대한 자손의 도리도  아내 손을 빌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남편은 자기도 제삿날을 잊고 지나고선 날보고 비난하는 눈길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보다 내 부모에게 야속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날들이 떠올라 미운 생각이 들었다.
제 부모, 제 조상 귀한 줄 아는 사람이  남의 부모 귀한 줄은 왜 모른단 말인가?

 

다 잊은 줄 알았다.
남편과 희희낙락 즐겁게 웃고 잘 산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는 다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남편이 미운 순간들이 있다.
상처가 치료되어도 남는 흉터인가보다.
오늘 아침은 그 흉터가 유난히 보기 싫게 두드러져 보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