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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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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쓰는 여자


BY 개망초꽃 2005-01-24

일산에 모자하면 아실런지 모르실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외출을 할 땐 모자를 눌러 쓰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챙이 둥그렇게 달린 모자만 쓰는데,
모자 챙 아래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세상 밖 풍경을 잘라서는 보고 싶은 만큼만 보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모자아래 숨기며 내 길을 걸었다.
모자 아래 자폐적인 내 세상은 어릴 적에 동생들과 숨바꼭질을 하면 내가 꼭꼭 숨는
곳이랑 분위기가 흡사했다. 깻단을 원뿔형으로 쌓아 놓은 뒷밭은 작은 내 몸을 숨기기엔
알맞았었다. 깻단과 깻단 사이를 벌려 들어가면 그 안엔 동그란 나만의 세계가 생기는데
동그란 세계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숨어 있으면 누구도 나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아무도 나를 꺼낼 수 없는 깊고 깊은 동굴 속 같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나오는 가시
덤불에 갇힌 마법의 성 같기고 했다. 난 깻단 속에 갇힌 공주가 되어 위를 보면 깻단 사이로
작고 동그란 하늘이 보였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이 아닌 하늘이 깻단에 어느 정도 걸려져
내린 빛이라 은은했다. 나는 모자를 쓰면 어릴 적 그 곳이 여릿여릿 보였다.

아이 둘을 재워 놓고 밤새도록 남편을 기다렸다.
그 날도 남편은 새벽바람을 맞고 들어와 까맣게 타 들어간 얼굴로 자고 있다.
나는 거실로 나와 어두운 창밖을 혼자 앉아 있곤 했다.
도망가방을 몇 달 전부터 챙겨 신발장 속에 넣어 놓고서 오늘은 떠나야지 그래 오늘은
마음 약해지지 말고 떠나야지...... 옷가지는 여러 벌 챙겼지만 갈 곳을 챙기지 못한 나는
다음날이면 냄비 밥을 얹혀 놓고 된장국을 끓였다. 한 달만 더 참아보자 한달만......
밤을 꼬박 새운 날이면 노리끼리한 얼굴이 화장실 거울에 표정 없이 서 있다. 머리카락도
윤기를 잃은 지 오래고 세면대에 빠진 머리카락이 꼼꼼한 거미가 짜 놓은 거미줄 같다.
이런 날 볼일이 있으면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외출을 한다. 나만의 자폐적 세상에
나를 집어 놓고 은행을 들리고 수퍼마켓을 걸치며 아는 얼굴을 만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볼일을 맞추고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의 세 개의 잠금장치를
탁 타닥 철컥 잠근다.


아이들은 잘 챙겼다. 때 맞춰 밥을 먹이고 간식을 직접 만들어 먹였다.
창틈을 걸레 모서리로 파내며 청소를 했다. 손자국 한 개라도 찾아내서 유리창 세재를
뿌리고 마른 걸레로 닦아 냈다. 씽크대에 반찬국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수세미로 문질렀고,
머리카락 한 개만 보여도 손으로 줍고 다녔다. 그러면서 매일 밤 도망 가방을 신발장에 감춰
두었고, 낮잠을 자고 또 자고 또 잤다. 친구를 안 만난지 일년이 넘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전화 안 받는다고 뭔 일이 생긴 줄 알고 친정엄마가 뛰어 오시기도 여러번이었다.
밤엔 텔레비전만 봤다. 리모콘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단추를 눌렀다. 그러다 어느 방송에서
주부 자폐증이라는 증상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아하 내 증상하고 똑 같구나 했다.
그때부터 내가 자폐증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내가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를 보여주기 싫었다. 사람을 만나기 싫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남편과 나 사이에 도박이란 것이 끼어들어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었고, 입고 싶은 게 없었고,먹고 싶은 게 없었다.
바위덩어리가 나를 짓눌렀다. 그 바위덩어리는 이를테면 남편과의 성격차이가 아니였고
남편의 정신나라에서 얹혀 내려가지 않는 도박이었다.
그 정신나라를 신나게 걷는 자는 남편이었지만 그 나라에서 난 도망치고 싶었고,
놓고 싶었고 껍질을 벗고 겨울에 개불알풀꽃이 피는 남쪽나라로 가고 싶었다.

남쪽으로 가면 찌그러진 내 자화상이 펴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 첫사랑이란 막연한 추억이 살아 있어서 그랬다.
신발장에서 나의 도망을 기다리던 보따리를 끄집어내던 날이 있었다.
그때가 봄이 오려고 하는 늦겨울이었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단순화 되어버린
동물처럼 자식이 자는 틈을 타서 남쪽으로 가는 밤 기차를 올라탔다.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검정색 챙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차창밖만 쳐다보았다.
새벽녘에 도착한 남쪽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대합실에서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갔더니, 가로수 밑둥에 개불알풀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아침을 먹으려 역 앞 허름한 식당으로 가서 백반을 시켰다.
맛없는 밥을 먹고 있는데, 사십 중반을 넘긴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오자마자 소주를
시키더니  나를 한잔 따라 주겠다고 한다. 싫다고 해도 막무가네였다. 주인 아줌마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지금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마누라와 만나기로
했는데 니미 씨팔 그 년이 안 나와서 술 한잔하러 왔는데 왜 자기 술을 안 받냐고
하면서 사람을 죽여서 7년만에 세상밖으로 나왔다고 떠벌렸다.

난 밥도 못 먹고 탁자위에 밥 값을 슬그머니 내려 놓고 식당을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쫒아와서 칼로 나를 찌를 것 같았다. 집으로 올라오는 기차표를 끊고 사람이 제일 많이
득시글거리는 대합실에서 숨어 있다가 기차에 올라타서야 편안 숨을 고르게 쉬었다.

집을 떠난 다른 나라밖은 더 써늘하고 섬짓했다. 살인자를 만난 그 뒤부터 두 번 다시는
혼자서 떠나 헤매지 않았다. 그 도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밤마다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겐 남편이 없다고 남편을 내 마음에서 죽여 버렸다.
새벽에 지나도록 안 들어와도 남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아침에서야 도박 판이 찍힌 몰골로
들어와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는 척했다. 며칠만에 들어와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남편은 나의 무관심이 섭섭했는지 왜 전화도 안하냐고 묻기 시작하더니
혼자서 술을 먹으며 외롭다고 울었다. 도박으로 집 한채를 시원하게 말아 잡수시고
뭐가 억울한지 처음으로  나를 붙들고 울더니 두 번째로 울던 날은 자기 자신이 외롭다고
더 서럽게 울었다.두 번째로 남편이 나 때문에 울던 그 시절부터 모자를 사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제일 가까운 쇼핑센타 후문엔 모자 가게가 두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게 모자는 잘 진열 돼 있었고, 난 계절마다 몇 개씩 모자를 소유하게
되었다. 모자에 맞춰 옷을 사 입었고 옷에 맞춰 모자를 샀다. 내가 두 개의 상점에서 모자를
사 쓰다 보니 어느 순간에 내가 살던 8단지 아파트 여자들이 모자를 너도 나도 쓰게 되었다.
그 여자들도 나처럼 남편을 죽이고서 주부자폐증상을 보였는지, 내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모습이 우아하게 분위기 있어 보였던 것인지, 아님 나의 어린시절 깻단 아래처럼 은은한
그늘이 좋은것인가...그와 동시에 모자 상점은 장사가 잘 되어서 윤택해 보였고, 십년이
되도록 모자 상점은 다른 가게로 바뀌지 않았다.
우리 식구만이 그 곳을 떠나 두 갈래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