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버지가 말야~ 총각때 공군복을 입으면 얼마나 멋있는지 아냐~ 가슴이 여자젖처럼 불룩하니~ 오죽하면 한동네 사는 내 친구가 니 아버지땜에 상사병이 다 났었겠냐~" "정말~?" 엄마의 오버된 말을 들으면 아버지는 영락없는 지금의 최민수이다. 67세이신 엄마는 아직도 이렇게 처녀적 아버지와의 첫만남을 잊지않고 있었다. 그리곤 연이은 핑크빛 신혼생활을 물으니 좀전의 얘기와는 전혀 상반된 얘기를 하였다. "으이그~을매나 쌀쌀맞던지 한이불속에서도 발닿는것도 싫어하고 밤새 혼자 책만 보더라.." 허긴 지금도 아버지는 사학과를 나온 오빠보다 역사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비화까지 얘기하시는 모습을 보면 분명 독서광임을 알수 있었다 아버지는 미군부대를 다니셨다. 내가 어린시절 아버지가 퇴근무렵 가지고 오시는 샌드위치는 지금도 맛볼수 없는 맛이었고 가끔은 아버지를 따라 부대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끊겨진 필름마냥 떠오르기도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눈과 큰코가 아마 그 시대 아이들하곤 달라 보였던지 사람들은 나를 보면 튀기같다는 소리를 자주 하곤 하였다. 엄마가 사진 한장을 보여준다. 리챠드기어처럼 잘생긴 미군아저씨가 어린 나를 번쩍 들어안고 찍은 모습을 가르키며.. "이 사람이 너를 무척 이뻐했었지.. 미국에 데리고 가서 키우겠다며 널 달라고 얼마나 조르든지~" (이그~그때 걍 보내지 그랬어~ 누가 알어 지금쯤 톰크루즈하고 결혼해서 멋지게 살고 있을지..하하..^^*)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문화적 욕심은 그 누구못지 않았다. 공기총을 매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나의 눈에도 멋있어 보였다. 한 겨울 어린 오빠를 데리고 산에 가서는 해질녘쯤 돌아오시면 우리는 아버지가 잡아온 참새를 맛있게 구워 먹곤 하였다. 아버지는 미군부대에 있었던 영향탓인지 파티문화와 여행문화에 이미 익숙해져 있음을 앨범속 흑백 사진들이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사진 찍어주기를 좋아하셨고 부자도 아닌 우리집은 남들보다 티브와 전화기며 작은 문화혜택을 아버지 덕에 먼저 누리곤 하였다. 주말의 영화 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늘 우리들을 죄다 안방에 불러 앉혀놓곤 영화관처럼 방안의 불을 끄고 영화를 함께 보곤하였다. 그러다 불현듯 영화속에서 키스장면이 나오면 혼자 쑥스러워 눈길에 갈피를 못잡고 수줍어했던 나. 언제나 애정 표현 없고 무뚝뚝한 아버지시지만 힘든 집안 일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고 오빠가 외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딸셋인 우리와 전혀 차별없이 공평하셨다.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혹독하게 키우신 아버지. 일요일이면 혹여나 동네 엄마친구들이 올까봐 대문을 꼭 걸어 잠그고 큰다라에 이불을 밟아 빨고 어린 세딸들의 때도 박박 밀어주시곤 하셨다. 술 못드시는 아버지께서는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며 아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입시생인 우리를 위해 밤잠 안자며 계란넣은 커피를 손수 방에 가져다 주시는 일은 늘 아버지 몫이셨다. 그렇게 가정적이고 자상하기만 하던 중년의 아버지에게도 어느날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직장에서 함께 있던 독신녀인 그녀의 이름은 케리.. 그녀는 아주 인테리였다. 내가 중학생일때 그녀는 아버지 직장동료로써 우리집에 오면 값비싼 선물과 과일들이 즐비했고, 우리가 인사를 하면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에 잡히는데로 용돈을 뜸뿍 주어 철모르는 우린 케리아줌마를 좋아했다. 부자 아줌마..능력있는 아줌마.. 그녀는 오빠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값비싼 시계를 선물해 주기도 하였다. 당시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들(오빠)과 함께 셋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자고 하였단다. 순박한 엄마 생활력 강하고 억척스런 엄마와는 반대로 그녀와 사고가 더 잘 맞는 아버지.. 그녀의 제안에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차마 엄마가 불쌍해서 어린 딸들이 불쌍해서 결국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엄마에게서 전해 들을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한 남자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쉼표같은 로맨스였음을... 문득 메디슨카운트의 다리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차가운 아버지의 변심으로 그녀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그렇게 아버지의 중년의 사랑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내가 고등학생때 아버지와 엄마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사교춤을 함께 배우셨다. 요즘시대 인터넷채팅으로 탈선해도 정도를 걷는 이가 있듯 당시에도 춤바람이 막연한 시대이지만 아버지와 엄마께서는 이미 지금의 스포츠 댄스를 앞서가듯 함께 즐기시곤 하셨다. 한편 흙을 무척 좋아하신 아버지는 휴일이면 늘 혼자 시골에 가서 땅을 열심히 개간하셨다. 그러던 중 너무 무리를 한탓에 디스크수술까지... 훗날 땅을 좋아하고 나무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간호학과를 가려던 동생에게 원예학과를 가게 한 고집센 분이셨고 엄마는 돈도 되지도 않은 일을 왜 하느냐며 구박을 줘도 아버지는 전혀 아랑곳 하지않고 나무와 꽃을 가꾸시더니 식목일 날 지방뉴스에 인터뷰까지.. -남자를 만날때는 동정으로 만나지 마라- 아버지는 왜 내게 그런말을 했는지 기억할수 없지만 스무살 꽃다운 딸아이에게 아버지로써 속깊은 충고였으리라 - 동정은 애정이 되고 애정은 욕정이 되는거라며- 내가 결혼할때 아버지께서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코끼리를 잡아 당길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로 여자의 역할을 새삼 되새겨 주셨다. 엄하신 아버지는 유머도 참 많으셨다. 학교 다닐때 성적이 떨어진 성적표에 도장을 받으려 쭈삣데며 내밀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꼴찌하겠다" 아무렴 꼴찌에 더 가까울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색한 이 분위기..^^; 더 노력해서 잘하라는 충고를 기대했던 난 그만 아버지의 어이없는 말에 피식~ 웃고 말았던 그날. 아버지~그말씀은 저를 두번 죽이는 거여요~ 그 유행어가 그때 나왔더라면..^^; 서울살던 지금의 남편과 시외전화를 쓰면 다음달 전화요금은 영락없이 내겐 쥐약이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딱 한마디만 하셨다. "차라리 만나라.." 엄하기로 소문 난 아버지가 세상에나.. 전화하지도 말고 만나지 말라고 혼낼줄 알았는데 한술 더 떠서는 ..차라리 만나랜다. 자고로 하던 짓도 멍석깔면 못하는 법이거늘 숨어있는 동굴속 박쥐에게 햇빛을 내려치는 가슴 아픈 아버지의 뼈아픈 고난도 유머는 지금도 잊지 못할 충격적인 유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별명은 호랑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날것 같지않은 차가운 머리와 이성을 가지신 아버지.. 큰딸인 내가 시집간 그날 밤.. 불끄고 잠자는줄 알았던 아버지가 이불속에서 혼자 울고 있더라는 얘기를 훗날 엄마에게 전해듣고 난 얼마나 울었던가.. 보이지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어리석은 딸이 바로 나다. 법없이도 살 사람.. 너무나 청렴결백해서 오히려 현실과 타협 못하고 목소리 큰 아버지.. 정년퇴직해서 냉혹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벌인 첫사업에 크게 실패하고 충격을 받으시고도 너무나 위풍당당해서 오히려 얄밉게마저 느꼈던 아버지.. 자식에겐 독립심을 확고하게 키워주신 아버지. 너희가 가난하면 쌀은 팔아줄순 있어도 다른 도움은 기대도 하지 말라며 선전포고하듯 이미 자식들에게 젖떼기를 하시던 아버지. 큰도둑은 작은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가끔 자식들에게 하기도 하였다. 훗날 나이를 먹어도 자식에게 의존하지않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세. 지금 내가 부모나이 되어 생각해보니 배워가야할 부분임을 새삼 느껴본다. 그렇게 당당하고 멋지신 아버지가 어느새 올해 칠순을 맞으시고 머리는 눈꽃보다 더 화려한 백발이 되셨다. 4년전 디스크 재발로 60 훨씬 넘은 연세에 허리 세곳을 수술하는 대수술을 한 뒤로는 운전대도 놓으시고 이젠 어린아이처럼 오빠의 보호를 받아야만 외출하시는 힘없는 노년의 아버지가 되셨다. 가끔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만하면.. 멋지게 살다 간다고.. 그래서 지금 죽어도 후회는 없다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딸에게 있어 첫번째 이성이라는데.. 이렇게 아버지를 멋진남자로 멋진 아버지로 추억할수 있게 해주어서 정말 고마울 뿐이다.. 평범하게 사신 아버지... 아버진 제게 있어 정말 멋진 남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