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거실바닥에, 때론 식탁 위나 안방으로 나를 졸졸 따라 다니며 배를 드러낸 채
엎드려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집중해서 읽으면 한나절 다 읽었을 책이 몇날 며칠째 흐트
러진 마음으로 인해서인지 눈에 영 들어오질 않는다.
그 와중에 문구 하나가 내 눈을 고정시키며 사로잡는다.
- 이 몸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
길들인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남이 아닌 나를 내가 좌지우지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방관이요 무심함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내 자신만큼은 책임
져야 할 나이가 아니던가.
간결하면서 쉽게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삶을 한번쯤은 되돌아 볼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법정스님의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평범한 삶의 철학서이기도 하다.
여늬 산행보다 이른 시각에 하산하여 안주한 내 집에서 벗처럼 편안한 책 한권이 선사한
문구를 보니 미루려 했던 산행기가 쓰고싶어 컴퓨터를 켜게 된다. 이 또한 정보화 물결에
길들여진 나의 습관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산을 가지 않으면 허기진 배 채우지 못함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허허로움을 잦은 산행으로 채우려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산이 내게 준 무상의 베품때문이리라.
12월 들어 네번째 산속으로 끌어들이는 나는 백두대간 백봉령에 첫발을 내딛는다.(08:00)
'어서 오십시오 아리랑의 고장 정선입니다'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영하의 날씨 속에 강릉
시와 정선군을 잇는 42번 국도변에 자리잡고 우리들을 반긴다. 강릉시 옥계면이라는 커다
란 표지판을 뒤로 하고 산들머리에서 급경사 오름길 산행이 시작된다.
폭신하면서도 평평한 산길이 우리에게 주는 워밍업 효과는 긴 시간 산행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초반부터 시작되는 급경사로 인해 오랜만에 산행하는 이들에게는 불편을
초래하게 할수도 있다. 경직된 근육과 불규칙한 호흡으로 초반부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간혹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29명의 회원들이 무난히 오른다.
남편의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없을 주부들의 아침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만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이미 버스 안에서 '일어났니' '잘 다녀와요' 하는 인삿말로
대신하고 산을 오를땐 안전과 내 자신만을 생각한다.
작은 내 하나 건너지 않고 산 능선만을 타면서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1,400 km 이어지는 산줄기 백두대간...
한해의 마무리를 우리 여성산악회는 백두대간의 한 줄기 타면서 멋지게 장식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히 배합되어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고 있다.
백두대간을 타면서 어느정도 길들여진 회원들의 모습은 하냥 밝기만 하다.
기온이 뚝 떨어져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쯤 될 것이라는 대장의 엄포에 그것마져도
길들여졌음인지 웃음으로 회답하는 우리 회원들이다.
추위에 얼어붙을까봐 볼을 감싸주는 고소모를 너도나도 푹 뒤집어쓰면서 눈만 빼꼼히
내민 영하의 산속 여인들,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월동장비를 철저히 갖춘
회원들의 준비 또한 대단했다.
야생화에 흠뻑 빠져 가는 발길 자주 멎게 했던 산행은 이제 모두 수분빠져 말라버린
풀과 옷벗은 나무들로 스산함 만들어 주며 나를 넓은시야로 눈 돌리게 만들어버렸다.
수많은 색으로 수목들의 옷을 갈아 입히며 뭇 산행인들의 눈과 마음을 씻어 주었던 산은
이제 온 기가 빠져버려 처연하면서 애처로운 느낌을 던져주고 있다.
조용한 동면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 듯 한 폭의 고화처럼 산은 말없이 우리를 받아 들이며
움푹 패인 좁은 길목인 원방재에 발길 머물게 만든다.(10:40)
정선에서 동해 삼척으로 넘나들었던 요긴한 길목이라는 원방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곤
또 깔딱고개를 넘기 시작한다.
누구하나 불평불만없이 예정된 코스대로 묵묵히 오른다. 완만한 산길을 걸을때는 모두가
수다맨이요 경사진 길을 오를때는 어느 누구도 입 한번 떼지 않는다. 숨고르기 위함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사목에 허접한 표지판 하나가 상월산임을 알린다.
겨울하늘 같지 않은 청청함이 햇살을 산 위에 뿌려준다. 나무끝 우듬지에서 새순나올까
착각할 정도로 따뜻한 햇살을 나목에게 한겹 입혀주는 날씨이다. 발과 얼굴에 채이는 철쭉
가지들이 뭇 매를 우리에게 사정없이 선사해 주며 정오가 될 무렵 두타신이 보호해준다는
천여미터 높이의 헬기장에 도착하게 된다.(12:00)
5월부터 시작하여 9번의 산행으로 마무리하는 여성산악회의 납회식...
그간의 무사산행에 산신의 보호가 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엎드려 상향 삼배함으로
간단하게 의식을 마치고 홀대했던 배에 먹거리들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늦잠으로 갑작스레 김치넣고 끓였다는 회원의 김칫국이 칼칼하여 '크'소리가 절로 나온다.
김장김치라며 맛보라고 건내주는 회원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배 채우는 소리가 소리없는
포만감으로 충족시켜주면서 30 여분으로 점심시간 종지부를 찍는다. 더 머물면 추위가
밀려오기에 행보를 준비하며 일렬로 대장을 따르는 회원들의 모습은 지시가 없어도 자연
스레 이루어진다.(13:00)
백두대간의 한 구간을 남겨놓고 하산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깝지만 후일을 위해 미련일랑
은 던져두고 일찌감치 하산길로 접어든다. 고적대 연칠성령 사원터로 가려고 했던 코스를
동해의 삼화로 바꾸면서 사원터로 하산하는 내리막길을 내심 염려했던 회원에게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아름드리 노송들이 즐비한 산길에 사진 몇 컷 찍다보니 앞서간 사람을 놓쳐버렸다.
넓게 닦여진 산길이어서 잠깐의 산속 고즈넉함을 한껏 느껴 보았다. 떨어진 솔방울을 발로
톡 쳐보기도 하고 뒤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산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도 하면서 여유를
부려 본다. 건초들이 쌓여있고 키 큰 억새풀 사이로 보이는 양철지붕의 허름한 집 마당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일에 열중하여 있다. 회원이 건내는 말에 친절히 답해주는 행색이 남루한
노인은 사탕 몇개에 밝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산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위한 마음씨가
참으로 예쁜 광경으로 눈에 들어온다.
한시간 정도 내려가면 마을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개 두마리가 묶여진 끈과 함께
발버둥치며 짖어댄다. 산중노인과 함께 하는 개도 한마디 거들고 싶었는지 마냥 시끄럽
기만 하다.
눈에 익은 소담스런 까페 '잎새바람'
몇년전 와 보았던 첩첩산중 산속에 있던 것처럼 보였던 찻집이 하산길 말미에
자리잡고 있다니 생경스러워 다시한번 바라본다.
다녀간 흔적을 알려놓은 노트 몇권과 말 그대로 셀프인 찻집에는 차 몇잔을 마시고
양심껏 돈을 넣고 가야하는 양심통이 손님들을 지키고 있다. 반가워 들어가 보고
싶지만 카메라에 찻집을 통째로 집어넣는 것으로 그 아쉬움 대신한다.
태풍으로 변해버린 동네가 옛길 그대로 간직되기 원하는 우리들의 눈에
실망스러움으로 들어오니 터를 잡고 사는 주민들에게 시부렁거리는 과객의 한마디가
얼마나 얄밉게 들릴까 싶어 얼른 거둬 들인다.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하산한 일행들에게 빠질수 없는 부침개와 막걸리가 등장했다.
누군가의 고생으로 여러 명이 즐기며 웃을수 있는 시간, 막걸리 한 잔에 무사산행과
대장의 노고에 대한 축배를 올리며 2004년의 산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14:30)
5월의 가리왕산은 불참하였고, 6월의 함백산, 7월 대덕산, 8월 싸리재에서 출발하여
지각산을 경유한 잊지못할 대간코스, 9월 응봉산, 10월 설악산과 덕항산의 두번산행
그리고 11월 두타, 청옥산행에 이은 마지막 12월산행....
언제나 늘 그랬듯이 산에게, 우리 모두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이제는 산에 올라야만 삶의 재충전이 시도되듯이 내 안의 허허로움을 산에서 채우며
너절한 삶의 빈 가지치기가 생활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이 몸은 길들이기 나름이다라고 쓰여져 있는 법정스님의 책자 속에서 내 자신을 돌아
본다.
엎드려 침대 위에서 한숨 자고 있는 책 '홀로사는 즐거움'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