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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달력


BY 개망초꽃 2004-12-20

오늘은 매장에서 팔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다.
매주 월수금 물건이 들어오는데 물건 들어오는 시간은 정신없이 바쁘다.
찰옥수수 강냉이 한 박스 들어오고,
콩단백질로 만든 콩제품이 한 박스고,
무농약 당근 두개와 토마토 두 개로 짠 당근토마토 즙이 신문지로 잘 싸서 들어왔다.
그밖에 우리밀 과자.무농약 채소,천연양념 간장,유자차.......
이들 위에 네모나고 얇은 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달력인가? 맞았다 2005년 달력이었다.
그래 또 한해가 구름처럼 흘러갔구나......

매장에 물건을 대주는 곳이 있다.무공이네라는 시골 옆집 아이 이름 같은 무공이네......
그 시골아이  물류창고에서 달력을 만들었나보다.
누런 박스를 열어보니, 민들레가 새끼들을 동그랗게 이고
두어 개의 새끼가 까치머리를 해 갖고 날아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여리고 연한빛 수채화에 연필로 쓴 몇줄의 시, 시라기 보다는 낙서에 가까운 글이었다.

"이사 하시려나 봅니다.
바람을 기다리시나 봅니다.
꽃 피우고 또 다른 여행을 하시나 봅니다.
꽃 피우기 위해 여행하는 것 보다
여행하기 위해 꽃을 피웠나 봅니다.
바람을 기다리는 바램으로
그곳에 서 있나 봅니다.
2004 ' 버리기와 버리기'성주"

이런 글이 민들레 어미밑에 연필로 써 있었다.
난 단순하게도 연필로 직접 썼는 줄 알고 검지로 문질러 보았다.
물론 원본은 연필로 쓴 게 분명하겠지만 그 느낌 그대로 인쇄를 한 거겠지.
물건 진열하는 일을 미루고 달력을 연애편지를 받은듯 설레임으로 넘겼다.
달달이 한 장씩 아주 흔하디 흔하고 천하기 천한 풀꽃들이 단순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에
풀꽃의 느낌따라 연필로 낙서를 한 글이 한장씩 한장씩 넘길때마다 나타났다.

1월은 고마리였다. 논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논물 가장자리나
실개천 물가에 소담하게 모여 자라는 고마리였다.

2월은 진퍼리새였다.흙포장 시골 길가에 버스가 지나가면 먼지를 잔뜩 묻히고 있던
볼것도 없고 별로 보고싶지도 않은 그야말로 잡풀인, 잎은 벼와 비슷하고 꽃이라 할 수 없는
씨같은 꽃이 먼지처럼 묻어 있던 진퍼리새라는 풀이었다.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이름은 지금 알게 되어서 미안했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심심하면 얼굴을 잡아 뜯었던 풀이었는데 그래서 미안했다.

3월은 털여뀌였다. 강아지풀과 항상 옆에 있던 친구, 이삭이랑 닮았다.빨간색 이삭.

4월은 애기똥풀이었다.줄기를 꺽으면 노란액이 나오는데 그래서 애기똥풀이라 하는데,
풀 잎장에선 기분나쁜 별명이겠지만,노란색 십자모양의 꽃이 한여름 더위에 인생의 절정기에
다다른다. 오래된 나무 밑둥에 피어나면  한층 더 아름다운 자신을 뽑내던 애기똥풀이었다.

5월은 강아지풀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없는 강아지 꼬랑지를 닮은 강아지풀.
풀섶에 모여서 바람에 꼬리를 흔들면 뛰어가 안아주고 싶은 복실 강아지풀.

6월은 질경이었다. 질기디 질긴 생명력과 오래된 생각을 가진 질경이는 마차 바퀴가 지나가도
잘 자란다 하여 질경이라고 한다. 질경인 잎도 꽃도 민망스럽게 밉게 생겼다.
그러나 이 풀을 한곳에 가꿔 놓은 걸 용인민속촌에서 본 뒤로는
고향으로 가는 정겨운 비포장 길을 그런대로 생각나게 한다.
하루에 두 세번 들어오는 버스길 가장자리에서 생명을 이어가던 질경이의 질긴 인생길.

7월은 물봉선화였다. 산골 계곡을 끼고 여름이면 온 힘을 다해 연붉게 피어 나던 꽃은
외갓집 장독대에 여름내내 살고 있던 봉선화랑 닮았다.
우리 엄마 유년에도 내 유년에도 살아 있던 물을 좋아하던 물봉선화는
수줍은 산골처녀랑 닮아있었다.

8월은 달개비였다.
푸르른 바다빛이랄까? 파아란 하늘빛이라고 할까? 드물고 귀한 파란색 꽃이다.
여름 논두렁에 아침 이슬을 윗입술에 머금고 있으면 그 신비로움이란?

9월은 달맞이꽃이다. 밤에만 피는 꽃이라해서 달맞이라 했다.
어릴적에 산을 넘어 예배당에 갔다 오다 보면 하늘엔 달이 ?아 오고
산길엔 달맞이 꽃이 달을 우러러 줄지어 피어 있었다.

10월은 여뀌꽃이다. 3월의 털여뀌와 똑같은데 털여뀌는 종아리에 털이 나서 털자가 붙었다.
10월 달력에 그려진 여뀌는 털이 없이 종아리가 여자다리처럼 맨질거린다.

11월은 바랭이라는 풀이다. 난 바랭이를 보면 바지 가랭이가 연생된다.
과일장사할 때 입던 엄마 몸빼바지 가랭이,
엉덩이 밑으로 한참 쳐진 외할아버지 한복바지 가랭이,
낡아져 꿰멘 남동생 바지 가랭이, 짧아져 밑으로 잡아 당겨 입던 내 바지 가랭이.
바지 가랭이와 바랭이는 어떤 연관성이 고리처럼 엮겨 있는 지는 몰라도 바지 가랭이 처럼
엉덩이 밑으로 몇가닥으로 갈라진 꽃줄기가 있다.
질경이와 진퍼리새와 비스무리한 꽃을 피운다.
꽃은 꽃이라 할 수 없지만 인연의 고리를 맺어야하는 계절이 오면
줄기와 같을 색 꽃을 피우고 새끼를 낳아 풀의 인생으로 자리를 잡는다.

12월은 겉표지에 있던 동그랗게 씨를 꽂고 있던 민들레였다.

설핏 한장씩 뒤적여 보고 오늘 온 물건을 제자리로 넣은 다음 달력을 세세히 들쳐 보았다.
이런 달력도 있었구나. 이런 보잘것 없는 풀도 주인공이 되어 주제가 되어 달력이 되었구나.
풀꽃도 세상에 나왔구나. 아무도 보아 주지않고, 알아주지도 않던 먼지 뒤집어 쓰고 있던 풀이
요즘 세상에서는 주인공이 되는구나.

넌덜머리가 나도록 날 외롭게 만든 인간이 싫었다.
나는 풀을 보며 인간을 이해하려고 했다
아스팔트 사이로 풀이 올라오면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연결지었다.
인간이 가꿔 논 잔디위로 풀꽃 한송이가 가냘프게 피어나면 인간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간 있는 곳엔 살기 거북하다고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렸었다.
나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던져주고, 내 이득을 위해 머리 굴리는 변덕스러운 인간이면서 말이다.
자연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속에 자연이 있어야 풀꽃도 인간도 진정 아름다운데 말이다.

올 달력위에 내년 풀꽃 달력을 걸어 놨다.
풀꽃 달력을 보며 나와 맞지 않은 상대방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