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아이에 대한 회상...
첫아이는 허니문베이비였습니다.
시할머님께서는 늘 말씀 하셨죠. “ 내 죽기 전에 증손자 한번 품에 안아 봤으면...”
남편은 30살이 다 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한 노총각이었습니다. 남편은 손재주가 있어서 컴퓨터를 잘 고치는데 그날도 친구집에 고장난 컴퓨터를 고쳐 주러 갔다가 컴퓨터 위에 있는 포토사진을 보고 친구 동생에게 누구냐며 소개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처음 본 날 저는 제 인생의 콩깍지가 씌어 버렸습니다. 제가 먼저 좋아했고,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죠. 남편의 전화를 기다리다 지친 저는 먼저 전화를 걸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연애 1년 오월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폐백실에서 시부모님께 절을 올릴때 시할머님께서 말씀 하셨지요. “ 냐 쥭기 전에 증손주 품에 안게 해 달라고...”
제주도의 봄 햇살의 따사로웠습니다. 처음 타 보는 비행기, 처음 여행 하는 제주도... 황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질 (설사)이 유행이었는데 우리 부부도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이질에 걸렸습니다. 신혼여행 기간 동안 늘 함께 해서 행복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질 때문에 제대로 된 첫날밤을 꿈 꿀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신의 축복이었는지... 그렇게 힘든 역경속에서도 우리 사랑은 변치 않았고, 사랑스런 아가는 제 뱃속에서 곱게 자랐습니다. 결혼한지 한달뒤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뻤습니다. 하지만 두렵기도 했습니다. 아직 엄마가 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 내가 엄마가 된다고... 내가? ” 기쁨의 눈물과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서 눈물이 났습니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련지 자신은 없지만 친구처럼 다정한 엄마는 되어 줄 수 있겠지 막연한 기대감에 지독한 입덧이 시작 되었습니다. 첫 아이를 임신 하고 있을 당시 시어머님께서는 암으로 9년째 투병 생활을 하시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계셨습니다. 병드신 어머님 앞에서 유난스런 입덧으로 쾍쾍 거리는 며느리의 모습은 이쁘지만은 않았을텐데... 어머니는 아프신 몸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제 입맛을 찾아 주시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만 겨우 먹을뿐... 부엌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냉장고 문만 열어도... 쌀통 근처에만 가도... 지독한 입덧에 무더운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