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너무 슬픈 추억도둑고양이처럼 다가가 낡은 찬장 문을 살며시 열었다. 족히 3대를 묵은 듯한 김치, 생선, 간장, 된장 냄새들이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달려들어 콧속을 할퀴고 찬장 속에는 종부宗婦들의 고단함과 눈물들이 손때처럼 묻어 칸칸이 칙칙하면서도 번들거린다. 어머니는 찬장에 생쥐가 드나들고 칸살들이 삐걱거릴 때마다 찬장을 새것으로 바꿀 때가 지났다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열아홉 나이에 가난한 종가집에 시집와서 조모님으로부터 고된 시집살이를 한 종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불평을 할 때마다 못 들은 척 외면하다가도 어머니의 외출을 틈타 슬며시 찬장을 살피다 쥐구멍에다 판자조각을 덧대기도 하고 삐걱거리는 칸살에 못을 치기도 하였다. 종가집 찬장도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낸 종부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나는 진동하는 냄새들은 아랑곳 않고 손을 내밀어 찬장 속의 그릇들을 뒤졌다. 가보처럼 대물림된 사기沙器그릇들이 인기척에 놀란 생쥐의 눈처럼 빛났지만 찬장 속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혼부부가 한 살림을 차리고도 남을 만한 공간에 불빛이라곤 달랑 5와트 백열전구 하나뿐이니 찬장 속에 물건들이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기는 만무했다. 눈빛과 손이 촉수처럼 움직이자 흰 쌀밥이 가득 든 입 넓은 대접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찬장 안쪽에 여분으로 있던 빈 도시락에 밥을 황급히 퍼 담고 어머니가 아끼는 밑반찬(오이장아찌, 멸치볶음)까지 알뜰하게 털어 담았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시면 무슨 짓이냐며 경을 칠 노릇이지만 도시락이 주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그런 염려는 뒷전이었다. 어머니가 텃밭에서 돌아오기 전 책가방까지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실 나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 형, 누나들이 늘 부러웠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싸주는 도시락 속에는 평소 집에서 먹지 못한 특별한 반찬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업이 조금이라도 늦게 끝나는 날이면 어머니께 나에게도 도시락을 싸 달라고 졸랐지만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 주기는커녕 오히려 핀잔만 주었다. 바람 많은 나뭇가지만큼이나 많은 자식들의 도시락을 아침마다 챙겨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를 못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도시락을 싸 주지 않는 명분은 따로 있었다. 수업이 점심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후에 끝나는 것도 아닌데 집에 따뜻한 밥을 두고 굳이 도시락을 싸가서 찬밥을 먹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나는 한참 먹을 나이에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면 성장하는데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반론을 폈지만 그 때마다 어머니는 절로 터진 입이라 말도 잘한다며 내 말을 변명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철옹성처럼 느껴졌다. 시쳇말로 바늘하나 꽂을 틈이 없이 냉랭冷冷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도시락을 싸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만 그 때는 도시락을 싸지 않으면 사는 재미도 학교 가는 재미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꿈은 계획을 낳고 계획은 실천을 낳으며 실천은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꿈이 있는 사람은 결코 운명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으며 운명 또한 비겁한 사람에게는 강하지만 용기있는 사람에게는 약한 법이다. 날마다 기회를 엿보던 시월 어느 날 아침, 기와지붕에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어머니가 텃밭에 다녀오느라 잠시 부엌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스스로 도시락을 싸는데 성공한 것이다. 동네어귀를 나오는데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서고 책가방도 평소보다 무거웠지만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을 하니 십 리를 걸어야할 발걸음도, 도시락이 든 책가방도 새털처럼 가벼웠다. 엉킨 타래실도 한 줄이 풀리면 다 잘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날 아침도 그랬다. 평소 같으면 마을 선후배의 자전거 짐받이를 얻어 타고 학교를 갔을 텐데 운이 좋게도 읍내 장을 보러 가는 동네아저씨의 경운기까지 얻어 타게 되었다. 자전거 짐받이에 비하면 경운기의 짐 칸은 형언할 수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경운기가 신작로에 접어들자 추위를 견디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등교하는 여학생들이 부러운 듯 쳐다봤다. 나는 자가용을 탄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고 매일 장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경운기가 신작로를 힘차게 달리는 동안 세상의 즐거움을 내 마음에 다 담은 듯 풍요로웠지만 아뿔싸, 그 즐거움은 끝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실수는 방관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거드름을 피운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경운기가 언덕길을 오르며 요동을 치는 바람에 나는 들고 있던 책가방을 그만 놓쳐 버렸고 책가방은 모든 것을 구토하듯 땅바닥에 토해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내 목소리에 놀란 아저씨는 경운기를 급히 세웠고 등교를 하던 학생들은 '얼씨구 좋다!' 벌떼처럼 몰려왔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신작로에 널브러진 책과 공책들 위에 도시락 뚜껑이 열리면서 시퍼렇게 멍이든 꽁보리밥은 팝콘처럼 흩어졌고 오이장아찌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면도날이 되어 귓바퀴를 잘라 내는 듯하였고 꽁보리밥을 가리키는 학생들의 손가락은 송곳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나의 자존심은 유혈流血이 낭자하고 참담했다. 쥐구멍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현장에 바늘구멍크기의 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내 몸은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온몸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지만 심장은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서늘했다. 범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의 심정이 이럴까? 더 살아서 무엇을 얻을 것이 있겠는가? 순간적으로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곳이 지옥이었다. 나는 도시락에 퍼 담은 밥이 초벌로 삶아 놓은 꽁보리밥인줄 꿈에도 몰랐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감쪽같이 없어진 꽁보리밥이 생쥐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아버지를 또 탓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애써 정신을 차린 나는 책가방과 구겨진 도시락을 수습하면서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 때였다. 현장을 목격하던 주근깨 투성인 여학생의 말 한마디에 나는 까딱하면 기절할 뻔 했다. "어머, 도시락이 왠 꽁보리밥이야? 더럽게 못사는 아인가 보다." 사건 이후 도시락 얘기만 들어도 오싹 소름이 돋았고 사건현장을 지날 때마다 사춘기 시절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도시락보다 더 구겨진 상처를 입었었다. 지금도 서리가 내리는 아침이면 가끔 그 날의 기억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궂은 날에는 주근깨 투성인 사자使者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돈다. "더럽게...더럽게...더럽게 못사는 아인가 보다." 아, 미치겠다. . . . 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悠悠自適...잠시 山色에 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