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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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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밖에 약이없어


BY 가을단풍 2004-10-19

아이구 맙소사.

몇일전 이른 아침부터 집안이 뒤 흔들렸다.

이번에는 우리 시어머니께서 구급차에 실려 가셨기 때문이다.

응급실로 달려가보니 축 늘어진체 의식이 없으셨다.

코만 드르렁 드르렁 골아 댈 뿐 눈동자도 확 풀려 버렸다.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하얬다

몇일전부터 구토 설사를 하시는것을 알았는데  평소에 자주 배탈이 나 병원 신세를 지셨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우리 애들 아빠가 귀를 수술한후 집에도 돌봐야 하는 환자가 있기에 시 동생한테 맡겨왔었다.

그런데 비로서 일이 터져버린것이다.

그 동안 병원을 안 갔었느냐고.

아니야 그 전날 탈수가 심해서 링켈도 맞춰드리고 영양제가 맞춰드렸는걸.

그런데 왜?..................

정확히 알수없어 이것 저것 수없는 검사를 마쳤다.

뇌검사까지 마 끝냈지만 정확히 원인을 알수없으신체 의식이 없으셨다.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기란다.

거기에가면 산소호흡기도 있고 뭤도 있고 뭤도 있고..........

그러나 그 고적한 중환자실에 어떻게 어머님을 집어넣어

의사와 안된다고 실갱이를 했다.

조금만 늦춰달라 실갱이를 하다가 할수없이 지고 말았다.

추루륵 추르륵 침대를 밀어 중환자실로 가는 도중 별안간 울움이 터져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신음하는 어머님을 뵈면서 우리 어머님께서 자주 부르시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기에 참아야 한다기에...........

 

우리 어머님 가끔씩 시어머니 노릇을 하셨었다..

이상한 억지소리를하여 내가 아주 참담할때도 있었다.

어느때 나는 아들 없는것을 아주 감사한적도 있었거든.

딸만 있는 나는 절대 시어머니가 안될테니까.

그러나 그러나 이거는 아니야.

그리고 내가 정말 아팠을때 나를 횟불처럼 지켜주신 분이었어.

아들을 둘씩이나 잃은 며느리를 한번도 구박한적이 없었어.

아마 그것으로 나를 구박하였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거야.

예전엔 우리 남편이 얼마나 아들 타령이 심했던지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이혼을 준비 했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 애비는 너 없이는 못산다.

저놈이 새끼때문에 눈이 뒤집혔다.니가 참아다오 니가 참아주면 내가 죽을때까지 너만 위해서 살겠노라.

내 아들 살려다오 내 아들 살려다오."

그러나 결심이 굳혀있었던 나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다고 이혼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우리 시어머니께서 정신을 잃으셨다.

그때는 일주일 이상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하셨다.

마음약한 우리 남편은 이혼을 미룰수 밖에.

그렇게 저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세월이가고 우리는 나이가 들어 아팠던 세월 만큼이나 정마져 깊어졌다.

지금은 남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나누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큰아이가 다리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주 잘 자라고 있고 두 딸아이도 귀여운 깡패처럼 잘 자라고 있다.

나에게 과거를 껌씹듯이 징걸 징걸 씹을 마음이 없다.

한때 방황을 하여 나를 아프게 했지만 누가 어느 아빠가 아이셋을 이만큼 키워주겠는가?

그리고 불여우같은 내 성격에 언제나 웃음을 끊지 못한다.

돈이 필요할때 언제나 오빠 오빠하며 여우를 뗀다.

그리고 쇼핑을 할땐 제일 어린 막내딸 노릇을 한다.

우리 남편 아까운줄 모르고 지갑에게 돈이 술술 나온다.

우리 짠돌씨  진짜 땡큐~

자기 몸에는 아주 인색하거든

지난번에 병원에 입원을 하였을때도 8인실을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거든.
꽤 긴 시간동안 많이 아팠지만 지금은 감사한일이 더 많다.

나에게 이런 세월을 견디면서 힘을 주신 분이 우리 시어머니시다
내 광란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주신 우리 어머니!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버텨주셨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오남매가 짝꿍 짝꿍 다 모였다.

가까운 일가 친척들도 모여들었다.

나는 집으로 병원으로 오가면서 식구들 치닥거리에 정신이 빠져버렸다.

힘든건지 바쁜건지 생각이 딱 끊어졌다.

2박 3일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의식이 회복되어갔다.

웨메 웨메~

이제는 식구들 먹이는게 문제가 되었다.

이 많은 식구들을 몇일씩 외식을 시킬수도 없고.

모두 당번제로 병원에 남겨놓고 몽땅 집으로 불러 걷둬 먹였다.

그런데 어머님 병세가 조금씩 회복이되자 조금씩 잔치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이구 이사람들 냄비 다 빵꾸내는줄 알았다.

아니 냉장고까지 먹어치우는줄 알았다.

그럴수밖에.

몇끼를 대충 대충 때웠으니.

아이구 우리 어머님은 쌘스도 만점이지.

우연이지만 냉장고에 먹을것이 가득 가득 채여있는 상태였거든,

어쩌면 이렇게 시기를 잘맞줬담.

고모부들이 모두 찬사를 금치 못한다.

왜 이렇게 음식이 맛 있느냐 뭤도 맛있고 뭤도 맛있고.

왜 안그렇겠습니까?
모두 긴장이 풀렸고 우리 어머님 병세가 호전이 되는데 모두들 콘도빌려 놀러왔다고 깔깔거렸다.

떽 ~

밥을 해주는 콘도가 어딨어.

왕초 우리 아이 큰 고모부께서 우리 애들 아빠께 이르는 말씀

"처남 절대 은아 엄마 돈걱정 시키지 마.하고 싶은거 다 하게 해줘."

이다음에 아이들 교육비 모자르면 내가 댈테니까 걱정말고 쓰쇼."
어머나 이게 웬떡이나.

말이 고맙지 설마 시누이 남편 신세야 지겠습니까.

그러나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집으로 돌아가면서 시누이들이 모두 자기들끼리 상의하여 간병인을 붙여주셨다.

시동생은 병원비를 절반이나 댄다나.

아이구 참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내.

가족들이 서로 사랑한다는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일이 어디있나요.

우리 어머님께서 살아오시면서 가끔씩 시어머니 노릇을 하셔서 속상할때도 있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신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어떡해 사느냐고.

팔자가 어째그렇게 고단하냐구.

 "사랑밖에는 약이 없어."

고단하기야 하지 입도 다 부르트고 식구들 밥해먹이느라고 손가락이 상처 투성이고

그러나 사랑의 힘이 있기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고개도 꿀떡 꿀떡 넘을수 있는거지.

그래 그런거야 사랑밖엔 약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