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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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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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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넷


BY 인 연 2004-10-16

    마흔 넷
    
    암회색시간 속에 여자는 버려져 있다.
    부풀어오른 이불에 절반쯤 덮인 여자의 반라半裸는 다글거리던 햇볕이 배어 든 상추 
    잎처럼 늘어져 있고 사슴을 닮아 가는 목은 턱 높은 베개를 힘겹게 넘고 있다. 
    숨소리는 평소와 달리 죽음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 고요하지만 간혹 경치를 구경하다 
    발을 헛 딛은 사람처럼 휘청거린다.
    엉클어진 머리카락은 단정한 아침의 기억을 상실하고 실성한 담쟁이넝쿨처럼 베개, 
    이불, 얼굴 등에 마구잡이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요일 아침,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던 여자는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며 
    딸아이 눈앞에 머리를 들이댔다. 딸아이는 흰머리가 너무 많아 다 뽑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염색을 하라며 말꼬리를 세웠고 여자의 입에서 절망적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저녁 여자는 거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빗질하는 노파처럼 손수 
    염색을 하였다. 
    여자는 오늘도 패드(falsies)가 달린 브래지어를 벗지 않고 잠이 들었다.
    베이지칼라의 브래지어가 아나콘다처럼 보인다.
    패드 속에 감추어진 여자의 젖가슴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을 것이며 유두는 
    간이 밴 무 장아찌처럼 말랑거릴 것이다.
    밴댕이젓갈보다 더 짠 세월의 횡포 앞에서 여자의 상징은 힘없이 무너졌다.
    '나 확대 수술할까?' 둘째 아이를 낳은 여자로부터 남자는 두 번의 질문을 받았었다.
    여자는 아킬레스건같은 자존심을 버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침잠한 듯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는 텔레비전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늘씬한 아가씨들이 비키니차림으로 무대를 걸어 나올 때마다 황소의 눈처럼 
    커진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비틀거렸다.
    천년을 침묵할 듯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는 토라졌고 텔레비전 코드를 뽑아
    버릴까 잠시 망설이다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버렸었다.
    먹이사냥을 끝낸 아나콘다는 여자의 작은 가슴을 휘감고 있고 아나콘다의 먹이가 된 
    젖가슴은 숨이 끊어질 듯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여자는 15개월 전에 태평양을 건넜다. 
    한국에 남자를 홀로 남겨 두고 중3학년의 딸과 중1학년인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겠다며 여자가 명분을 들이댔을 때 남자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남자의 눈에는 여자가 미국을 떠나는 날까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열차처럼 보였다.  
    여자가 스케줄을 짜고 항공권을 구입하고 옷 가방을 싸는 동안 남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용카드의 잔고가 바닥나도록 영수증에 사인하는 일이었다.
    남자는 여자와 자식이 떠나는 공항에서도 그 흔한 포옹도 못하고 귀가하여 자정이 
    넘도록 공허한 마음을 술로 채웠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지 이틀만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여자는 큰언니의 집에 
    한국을 풀어 놓았다.
    시차적응을 끝낸 여자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을 나갔고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가 
    있었다.
    여자가 미국에서 할 수 일이란 한국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거나 미용기술을 익히는 것과 
    네일 기술을 배우는 일 뿐이였다. 한국에서는 가히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던 여자는 언니가 운영하는 네일 가게를 나갔다.
    
    여자에게 미국은 또 다른 아나콘다였다. 
    한국에서의 모든 일상은 미국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철저하게 유린 당했으며 
    부엌에서 밴 진간장, 된장찌개, 김치찌개, 자반고등어, 멸치젓 냄새와 술을 마시는 것, 
    노래방가는 것, 찜질방가는 것, 운전하는 습관까지 심지어 본능적인 생각과 행위의 
    일부(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까지도 남김없이 털어 내야했다. 
    여자는 날마다 아침 8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아나콘다 속으로 들어간다.
    12시간 가까이 아나콘다의 발톱과 손톱을 깎아 주고 마사지 해주고 매니큐어를 
    발라주면서 몇 달러의 팁에 희망도 걸고 인생도 건다.
    여자는 요즘 점 때문에 고민이 많다. 점은 처음부터 크지 않았다고 하였다.
    얼마 전, 화장을 하던 여자는 눈 밑에서 깨알같이 작은 점 하나를 발견하였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점은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갔고 또 며칠이 지나자 점은 검버섯처럼 변하였다.
    점이 커갈수록 여자는 거울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고민도 늘어 가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점은 여자의 얼굴에 섬처럼 자리를 잡았다.
    여자가 낯선 미국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점은 여자의 영토에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자주독립국임을 선언을 해 버렸다.
    미물이라 생각하고 우습게 넘겨 버렸던 것이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여자는 이제 거울을 볼 때마다 점을 어떤 방식으로 제거해야할지 고민 중이다.
    점과 여자는 제2라운드의 전쟁을 준비 중이다. 누가 먼저 낯선 땅에서 진정한 뿌리를 
    내릴지 두고 볼일이다.
    
    속살을 드러낸 채 말라 버린 양파처럼 잠이든 여자에게서 제법 어머니의 냄새가 난다.
    마흔 넷의 여자는 내일도, 모레도 브래지어를 벗지 못하고 잠이 들것이며 아나콘다보다,
    검버섯보다 강한 꿈을 가슴에 품을 것이다. 
    시월의 바람이 비수처럼 날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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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