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우리시대 고문관
아빠는 스스로 자신이 군에서 고문관이었다고 말했다.
솔직한 건지 웃자고 한 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빠는 우리시대의
남자로서 가장 부끄러운 치부를 내게 드러낸 셈이다.
"사실은 아빠가 군에서 고문관으로 통했었다. 아빠는 아침 점호시간에 매일
늦어 늘 기합을 받았고 복장이 불량하고 행동이 굼뜨다는 이유로 행정관에게
눈두덩을 셀 수없이 꼬집혔다."
아빠는 말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자신의 눈두덩을 꼬집는 시늉을 하였고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
와 무용담을 늘어 놓는 병사 같았다.
"아침에 기상 나팔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나 모포를 개고 옷을 챙겨 입어도
가장 늦게 일어나 점호를 준비하는 고참보다도 항상 늦었다. 아무리 빨리
서둘러서 연병장에 나가도 맨 꼴찌였고 군화 끈도, 단추도 제대로 끼우지
못해 복장상태는 늘 엉망이었다."
나라면 회한悔恨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데 아빠는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얘기 도중 킥킥대고 웃기까지 하였다.
이 정도면 아빠는 군대가 다 아는 고문관이었을 텐데 병장 만기전역을 했다는
것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내가 봐도 아빠의 모든 동작은 느리고 굼뜨다. 아무리 아빠의 행동을 듣기
좋게 표현을 한다 해도 느긋하고 여유만만 하다는 말 밖에는 없을 것 같다.
꼼꼼하고 사려思慮가 깊으며 자신만만 하다는 표현을 쓴다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것이며 밴츠가 티코를 추월하려다 개 거품 물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아빠는 화장실에 가면 30분은 기본으로 채운다. 똥을 싸서 메주를 쑤는지 그
메주로 장을 담는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순서를 기다리는
가족은 죽을 맛이다. 가끔은 견디다 못한 누나는 바가지를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나는 방에서 볼일을 보는 누나를 상상하다 너무 웃겨
팬티에 오줌을 지린 적도 있었다.
아빠는 화장실에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화장실이 한 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듯 하였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20여 평의 공간에서 우리 가족같은 4식구가 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20여 평의 연립주택에 화장실을 두 곳에 만들면 주택건축분야에서
히트를 치고도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감생심焉敢生心 30만 원의 월세도 겨우 붓고 사는 마당에 두 개의
화장실을 꿈꾸다니. 남들이 들으면 개발에 편자라고 비꼴지도 모른다.
아빠는 화장실에 입실한지 30분이 지나서야 휘청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왔고
나는 심장 한 편이 서늘해지도록 감격했으며 몸은 찜질방에 누운 듯 노곤했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아기용 기저귀가 가끔 쌓여 있었다.
처음에 나는 공부도 안하고 날라리로만 고등학교 3년을 보내고 겨우 수도권의
별 볼일 없는 대학, 그것도 점수가 낮아서 일 년 동안은 전공도 선택하지 못한
상태로 진학하고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날라리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누나의 생리대인줄 알았다. 생리양이 좀 많을 때 사용하는.
그래서 나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있을 때마다 쌓여 있는 기저귀를 보면서
누나의 생리주기와 양을 나름대로 측정하고 때로는 발가벗은 모습까지도
상상을 했는데 엄마로부터 아빠의 기저귀라는 말을 듣고서 약간의 실망과 함께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궁금해 하고 민망해 하는 나를 본 엄마는 아빠가 장이 좋지 않아서 가끔씩
하혈을 한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이따금 아빠가 오리 걸음같이
어기적어기적 걸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빠는 담배도 술도 못한다.
그런데도 대장大腸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아빠가 부실한건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아빠는 대머리다. 삼년 전만해도 소갈머리였는데 지금은 거의 빛나리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빠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다.
아빠는 빗을 자신만의 영역에 먹이를 몰래 감추어 놓은 치타처럼 항상 양복
안주머니에 감추고 다니신다.
어떤 싸가지 없는 선배하나가 아빠 머리를 보고 문어대가리라고 비아냥거려
한바탕 치고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난 선배에게 아빠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여 주며 제발 친구들 앞에서 놀리지 말라며 때를 쓰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싸가지 없는 선배도 아빠 나이가 되면 틀림없이 대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나는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기까지 했었다.
아빠는 오늘도 30분이 넘는 시간을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용을 쓰며
하혈을 했을 것이고 소변이 마려웠는지 대변이 마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누나는
화장실 앞에서 몇 번 발을 동동 구르더니 꽃무늬 가방을 챙겨 들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날라리인 누나가 수도권의 4년제 대학문턱이라도 밟은 것은 기적이었다.
누나가 수능시험을 끝내고 집에 돌아 와 통곡하듯 한숨을 내려놓을 때 엄마는
가슴은 여러 번 무너졌었다.
누나는 시험을 망친 이유를 모두 자신의 실력과 전혀 관계 없는 듯 말했었다.
언어영역은 교과서에서 출제된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고 수리영역은 출제된
문제 중에 공통수학 비중이 적었다고 불평을 하였으며 사회탐구영역은 선생님을
잘 만나지 못해 망쳤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하지만 날라리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엄마도 누나의 말발에 금새 쇠뇌되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고 누나는 그 때마다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지 엄마 무릎
곁으로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나는 마침내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엄마의 한 숨소리는 끊임없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였고 누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동정이 가득하였다. 나는 누나가 재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의 가장, 고문관, 다크호스가 귀가하면서 날라리의 가증스러운 한숨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가증스러운 한숨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린 것이다.
"뭐, 재수?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그 날 저녁 나는 고문관의 아니 아빠의 위대함을 처음 느꼈다. 거목 같았었다.
고문관의 입에서 백정의 시퍼런 칼보다 더 섬뜩한 말이 나올 줄은 가족 누구도
짐작 못했다. 비록 칼은 아니었지만 '개 풀 뜯어먹는 소리' 라는 말에 누나는
다시금 기어 오를 수없다는 절망의 늪에 빠져 버렸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엄마의 눈이 순간적으로 놀란 올빼미 눈처럼 번뜩였다.
누나는 밤새도록 방문을 잠그고 날라리형머리를 -긴 머리카락 중간중간에 형형
색색 칼라를 입혔음- 쥐어 뜯으며 실현당한 처녀귀신처럼 흐느꼈다.
다음날, 엄마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누나가 다녔던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진학담당선생님과 상담을 하였고 온갖 진학정보지를 이 잡듯이 뒤졌다.
며칠이 지나자 엄마의 노력 결과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아빠에 이어서
홈런을 친 것이다. 그것도 그 어렵다는 랑데부홈런이었다.
엄마는 미대 졸업생답게 꼼꼼한 관찰력과 탁월한 영감으로 누나의 수능점수로도
갈 수 있는 두 개의 대학을 찾은 것이다.
흙 속에서 진주를 찾은 것과 사막에 떨어진 바늘을 찾은 것과 진배없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찾은 듯 며칠동안을 칩거하던 누나는 희희낙락喜喜樂樂했고
그 날 저녁 다시 날라리로 복귀한 누나는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했다.
누나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엄마의 핀잔에 친구들의 축하파티를 뿌릴 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아빠 말대로 누나는 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누나는 완벽하게 컨디션을 회복하였고 순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대학에
진학할 것처럼 당당하였으며 고등학교 때보다 더 화려한 날라리로 변신하였다.
나는 아빠가 어디서 근무했을까? 궁금했다. 왜냐하면 아빠같은 고문관을 삼년
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며 재워 주었을 군대라면 보통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근무했어요?"
아빠는 나의 얼굴을 말갛게 쳐다보더니 뼈대있는 가문의 종손처럼 거만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 이래뵈도 육본에서 근무했다. 육본은 별이 하도 많아 내 눈엔 별이 별같이
보이지 않고 말똥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많은 별들도 내게는 함부로 못했어.
오히려 별들이 나와 마주치면 ' 오, 강 일병! 요즘 잘 지내는가?'하고 안부를
물을 정도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살인의 추억을 보는 것도 아닌데 아빠의 말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빠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초리 또한 이마에 닿을 듯하자 약간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아빠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 주는 게 자식된 도리일 것 같아 궁금한
듯 먼저 물었다.
"세상에! 어떻게 장군이 사병에게 먼저 안부를 물을 수가 있어요? 말도 안돼."
"허허. 그럼 말도 안되지 암, 그렇고말고. 헌데 말이야. 사실이야. 육본은 청소할
사병들이 많지 않아서 가끔 별들이 건물 유리창을 닦는 경우도 있지.
그리고 사병보다 별이 더 많게 느껴질 정도로 별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같은
별이라도 짬밥에 따라 군기도 엄격하지."
갑자기 아빠가 이야기의 핵심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려는 것을 감지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아빠가 무지 대단했나 보네?"
"그럼, 대단했지. 어떤 별은 자신의 비서인 특무상사를 시켜 아빠에게 선물까지
보냈었지. 아마... 그 장군은 박통시절에 국방부장관까지 해 먹었었지."
대단했을 거라는 물음의 의미를 아빠는 파악을 못하는 것 같았고 순간 나는 삶은
고구마를 오물거리다 아직 씹지도 않은 고구마 조각이 식도에 걸린 듯 답답했다.
나의 짐작에는 아빠가 너무나 고문관 짓을 많이 해 그 소문이 돌고 돌아 장군의
귀까지 퍼졌을 것이다. 그래서 별들이 지나치다 아빠를 보게 되면 동정심이 생겨
한마디 던졌을 말인 것 같은 데 아빠는 군대를 제대한지 20여 년이 넘도록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빠가 고문관소리를 듣게 된 이유를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물었다.
더 이상 끌었다가 올해 같은 대학에 진학한 여자친구와의 약속시간을 넘길 것
같았다. 여자친구는 평생을 붙어먹어도 될 만큼 빵빵한 집안의 딸이고 나같이
내노라 하는 킹카가 무려 백일 동안이나 공을 드린 작품이었다.
아빠는 비로소 자신이 깜박이를 잘못 켜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급하게
말문을 돌렸다.
"아아, 그래. 사실 내 보직은 경리계였다. 그래서 육본에 있는 모든 군인들의
월급을 다 내가 취급했었지."
"월급 취급하는 것하고 별들에게 대우 받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는 아빠가 월급을 취급했다면 손에 돈 때가 묻도록 하루종일 돈만 세거나 더러
잘못 세기라도 하면 고참들에게 터지거나 행정관에게 눈두덩을 꼬집혀 눈도 못
떴을 것 같은 데 너무나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덧붙여 월급을 수령해 장군비서들에게 전해주면 너무 고마워하며 약간의
용돈까지 전달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아빠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그 때만해도 육본에서 근무하는 별들은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것 같다.
이야기 중간에 끼어 드는 사람이 잘못 들으면 육본에 있는 군인들의 월급을 모두
아빠가 책봉해서 주는 것처럼 오해할 지도 모르겠으나 사실을 확인할 길이없는
마당에 토를 달아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아빠의 말을 경청할 만큼했으니 이제 약간의 용돈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나는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자 아빠도 시계를 들여다 보며 외출을 해야 할 듯한 자세를 취하다 내가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자 지갑에서 조심스럽게 만원권을 꺼냈다.
아빠는 손끝에 달려나온 만원권이 한 장인지 두 장인지 확인 절차를 밟은 후에
선술집작부에게 내키지 않는 팁을 주듯이 시큰둥하게 건네주었다.
이제 아빠는 십중팔구 명보기원으로 갈 것이다. 아빠는 명보기원 원장님이다.
아빠는 프로기사는 아니지만 내기바둑에 관한 타의 추종追從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꼼수를 득도하고 있다. 아빠는 처음부터 원장님은 아니었다.
아빠는 원래 모 중견건설회사에서 경리과장으로 몇 년을 근무를 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느 날부터인가 출근을 하지 않으셨다.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 이유를 엄마에게 물었으나 명쾌한 대답을 못하는 것을
봐서는 아빠는 필시 무슨 비리에 연류 되어 잘렸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실직을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나 걱정을 하지
않았고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이러다 학교에도 못 갈 정도로 우리 집이 가난해 지면
어떡하나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 집에 쌀이 안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아빠와 엄마 사이에 무슨 꿍꿍이 속이 있거나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애초부터 혼자의 힘으로 살림을 꾸려 가야겠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빠는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었는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일 년을 백수로 지냈고 노는 것이 지겨울 때가 되어서야 기원을 나갔고 그 때부터
아빠는 바둑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아빠는 해가 저물고 달이 기울 때까지 기원을 떠나지 않았고 텔레비전을 봐도
바둑채널만 보았으며 책을 봐도 바둑에 관련된 것만 볼만큼 바둑에 전념을 한
결과 내기바둑계의 꼼수의 대가가 되었다.
내가 명보기원을 처음 안 것은 중학 2학년 때였다. 기원은 을지로3가 명보극장
맞은 편에 자리한 허름한 6층 건물 안에 있었는데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내게
아빠의 도시락 심부름을 시켰었다.
기원은 집에서부터 걸으면 20분, 뛰면 1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나는
언제나 30분을 넘겼었다. 나는 일부러 무릎에 요강을 씌운 듯이 천천히 걸었었다.
집에서 본 아빠의 모습과 기원에서의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아빠는 커피배달을 온 늙은 레지의 허벅지를 느끼한 눈으로 훔쳐보았고 바둑에
빠져 나를 보아도 수고했다. 고맙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 안 하였다.
아빠는 아침에 나가면 자정이 가까워져야 귀가하였다.
나는 그런 아빠가 미웠다. 아니 그런 아빠를 끔찍이도 챙기는 엄마가 더 미웠다.
가슴에 한 가닥의 자존심도 없는 엄마. 엄마는 점심 때가 가까워지면 김밥을 말아
은박지에 싸고 도시락가방에 조심스럽게 넣고서 나를 불렀다. 아빠 갖다 드려라.
나는 엄마가 도시락가방을 줄 때마다 내 팽개치고 싶었지만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가방의 디자인이나 칼라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칼라 감각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가방을 산 것 같았다.
도시락가방의 무늬는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고 고소한
김밥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쓰는 향수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는 도시락가방을 들고 가면서 청춘 남녀의 연예편지를 배달하러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엄마가 미대출신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숙제를 정성스럽게 해주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믿음에 신사임당이 부럽지 않았다.
클래식을 들으며 독서를 하는 엄마를 볼 때는 너무나 지적이고 고고했었다.
엄마는 우리 나라 미술계에서 제일로 인정하는 H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잠시동안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다 아빠를 만났고 결혼 전까지 일 년 동안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데이트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학교에 나간 지 육 개월, 아빠를 만난 지 두 달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단다.
이유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갑자기 발성이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담당한 이비인후과 담당의사도 정확한 원인을 몰라 느낌대로
스트레스성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잠시 휴직을 하라고 권했는데 엄마는 그 길로
당장 사표를 내고 집안에 들어 앉아 버렸단다. 엄마는 애초부터 선생은 적성에
맞지도 않았던 것인데 마침 아빠를 만나자 잘됐다 싶은 것이다.
아빠는 엄마가 처녀 때나 신혼 때나 이슬만 먹고사는 소녀 같았다고 하였다.
엄마는 해가 아파트 창문을 두드리면 그 때서야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베란다에서 한강을 응시하고 하늘에 구름을 보며
오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고 하였다.
아침식사도 아빠 스스로 해결하고 출근했단다.
아빠는 그런 엄마가 약간은 불만이었지만 잘못 건드리면 홀로 계신 장모님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엄두도 못 냈다고 하였다.
엄마는 20대 후반에 청상과부가 된 외할머니 품에서 외동딸로 외롭게 자랐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식장에서 난데없는 통곡이 있었는데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외할머니였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그만
실신을 하였고 결혼식장은 축하분위기에서 갑자기 초상집분위기로 바뀌어
버렸단다.
응급차가 달려와 실신한 외할머니를 진정시켜 겨우 가족사진은 찍었는데 결국
양가 어른께 폐백은 드리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엄마는 가끔 커피를 마시다가 음악을 듣다 자신이 전생에 공주였다고 능청스럽게
말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아빠의 건강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과부의 품에서 애지중지 자란
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며 오히려 너무 꼼꼼하여 빈틈이 없어 보인다.
아빠가 바둑계에 입문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대가가 된 것은 팔할 이상이 엄마의
각별한 내조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빠는 득도한 꼼수 몇 가지를 기원 사장에게 전수했고 사장은 보답으로
원장이라는 직함을 아빠에게 주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빠의 공식 직함이 명보기원의 원장님으로 바뀐 것이다.
사범도 거치지 않고 원장이 된다는 것은 바둑계의 이단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원에 모인 사람들은 아빠에게 원장님! 원장님!하며 꼼수를 한수 배우기 위해
갖은 아부를 다하였고 아빠는 그 때마다 특이한 너털웃음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뿌리쳤다.
그리고서 돈이 있을 것 같은 사람만 골라 꼼수를 약간씩 전수해 주었다.
그 때부터 명보기원은 사장과 원장이라는 두 직함이 공존하여 사람들은 직함 중에
누가 진짜 사장인지, 원장인지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꼼수에 강한 아빠를 진짜 사장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아빠는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자신이 진짜 사장인 냥 손님들을 접대하고 배웅까지
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진짜 사장은 아빠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졸지에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다 내가
중학 3학년 말엽에 사장은 결국 몇 푼의 보증금만 받고 아빠에게 기원을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바둑을 시작한지 정확히 2년만에 아빠는 바둑계에서 그 어렵다(?)는 기원의
실질적인 원장님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아빠는 일 년만에 명예직원장에서 기원
사장이 된 것이다.
아빠가 명보기원을 인수引受하고 개업식을 하던 날도 엄마는 기원 근처에 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왜 기원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침묵으로
일관하다 내가 팔을 잡아 끌며 대문을 나서려 하자 엄마는 그 때서야 속내를 알 듯
모를 듯 털어놓았다. 첫째 이유는 아빠가 나오지 말라 하였고 둘째 이유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 빌딩을 오르내리기 싫고 셋째 이유는 뭇 남성들 사이에서
담배 연기를 맡으며 잠시도 있기 싫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기원에 다녀오라며 내게 작은 보따리를 건 내 주었다.
기원에 도착해 보따리를 풀어 헤치자 아직 온기가 남은 인절미가 비닐봉지 안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개업식에 모인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자 인절미봉지는 금새 바닥을
드러냈고 사람들 사이에는 짙은 화장을 한 낯이 익은 여자 2명도 끼어 있었다.
아빠는 20여 평의 좁은 공간에서 스테이지의 댄서처럼 돌아 다니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가끔 한 30대 후반의 낯익은 여자에게 눈길을 주곤하였다.
여자는 아빠의 눈빛에 화답이라도 하듯 황토를 바른 듯한 입술을 삐쭉거렸고 잠시
후에는 아빠에게 다가와 천박한 교태까지 부렸다.
나는 그 때서야 엄마가 개업식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갑자기 한쪽귀퉁이에서 원당님! 원당님!하고 혀 짧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만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원당님의 근원지로 쏠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술이 잔뜩 취해 있었다. 행색을 보니 겨우 거지를 면한 듯 보였다.
사람들은 그가 조사범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보았고 많이 취했다며 그만 집에
가라며 소리쳤다.
당황한 아빠는 재빨리 다가가 입막음을 하고서 밖으로 끌고 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아빠는 눈을 맞고 들어와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 내듯
어깨를 툭툭 치더니 아까 그 여자에게로 다시 갔다.
내 짐작엔 아빠는 필시 조사범에게 입막음의 대가로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며 등을 떠밀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사범은 3년 전부터 일정한 직업도 없이 을지로를
떠돌았는데 우연히 명보기원을 들리게 되었단다. 기원 사장은 행색이 거지같아
쫓아내려 했는데 바둑을 두러 왔다며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바둑판을 하나 내주게
되었고 혼자서 바둑을 두는 것을 가만히 보니 예사 실력이 아니였단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사장은 그 사람과 바둑을 한판 두판 두기 시작하였고
내리 다섯 판을 지고 쌈짓돈까지 잃게 되었단다.
사장은 그에게 옷만 깨끗하게 차려 입으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는 언약을 했고
그 후 조사범은 명보기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원의 단골들도 조사범의 바둑실력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사장은 성이 조씨였기에 그에게 조사범이라는 직함까지 주었단다.
아빠도 처음엔 조사범에게 바둑을 배웠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고 하였다. 조사범이 기원에 나타난 지 그럭저럭 3년이 흘렀지만
조사범의 신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고 그나마 아빠가 좀 아는
편이라 하였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조사범 나이는 40대 중반이고 1년 전에 기원 근처 조그만
식당에서 무전주식無錢酒食을 하다 늙은 여주인에게 코가 끼어 오도가지도 못하고
같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조사범은 평소에는 말이없는 사람인데 목구멍에 술만 넘기면 아빠가 비밀이라며
털어 놓았던 아빠의 애인이름을 떠벌여 아빠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여주인과의
잠자리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떠들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기원에서는 조사범을 가장 친한 동지로-조사범은 사람들에게
내기바둑을 하도록 유도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함-치지만 밖에서는 경계 대상
1호로 지목하였다.
조사범이 가고 북적대던 사람들도 빠져 나가자 기원은 삽시간에 썰렁해졌다.
아직 가지 않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탁자에 둘러 앉아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아빠는 고스톱 판을 살피며 훈수를 두었고 낯익은 여자는 마누라인 냥 아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볼그레한 얼굴로 고스톱 판을 지켜보고 있다 등뒤에 서있는
나를 의식하고는 잘 지냈니?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얼떨결에 나도 여자를 향하여 고개를 꾸뻑 숙이고 말았다.
낯익은 여자를 내가 알게 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금요일 저녁때 퇴계로 대한극장 근처 길가에 우연히 나는 아빠의 낡은 스텔라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반가움에 차안을 살폈으나 아빠가 사용하고 보는 낯익은 물건들만 차창에
누워 있고 아빠는 흔적조차 없었다. 주위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찾아보았으나
아빠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빈 가슴에 소슬바람이 헤집고 들어오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하는 수없이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 때였다. 50여 미터 전방 골목에서 아빠는 신기루처럼 나타났고 뜻밖에 일이라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빠에게 달려가려던 나의 발걸음은 이내
멈추었고 내 심장의 박동은 1200볼트의 전압에 쇼크를 먹은 듯 멈추어 버렸다.
나는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또 비볐다.
하늘이 갑자기 노랗게 변했고 다리는 휘청거렸지만 지금 아빠에게 다가가서는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아빠를 등지고 황급히 가로수 뒤로 몸을 숨기고
긴 호흡을 내 뿜었다. 잠시 박동을 멈춰 버린 심장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몽달귀처럼 말라 가는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전방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명보기원의 명예직 원장 강성도-아빠였다.
아빠는 낯선 여자와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남산여관이
있는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여자는 그리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분명히
본듯한 인상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낡은 스텔라는 참았던 방귀를 뀌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고 차에
올라 탄 아빠와 여자는 시야에서 금새 멀어지고 나는 떨어진 낙엽처럼 바람에
몸을 맡겼다. 예전과 다른 맛의 눈물이 났다. 눈물은 몹시 짜고 매웠다.
개새끼, 씨팔 놈이네. 사람도 아니어. 아니 이제는 너는 내 아빠도 아니어.
강성도 너를 아빠라고 부르면 내가 성을 간다. 두 손이 저절로 불끈 쥐어졌다.
에이 씨발, 툇! 눈물과 섞인 가래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목젖까지 치밀고 올라
왔다. 강성도의 얼굴을 향해 뱉고 싶었다.
그 날밤 아빠는 밤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았고 나는 환영幻影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아빠의 인기척은 집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아빠가 외박한 이유를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말문을
열지 못하고 등교를 하고 말았다.
나는 종일토록 아빠와 여자가 남산여관에서 껴안고 뒹굴며 깔깔대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빠와 여자를 경멸하며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을 머릿속에 그렸다.
밤이 되자 아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귀가하였고 내게 학교 잘 다녀
왔느냐며 물었다. 강성도의 가증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뻔뻔스러운 새끼. 식도에서 개새끼. 씨팔 놈이란 외침들이 병목현상을 일으키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냉수를 들이켰으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고 이제는 아빠 앞에서
움직이는 공기조차 삼키기가 싫었다. 나는 침묵했고 아빠와 나는 며칠 동안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솔직히 아빠보다 엄마가 더 미웠다.
백치白痴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엄마가 너무 미워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어 엄마 곁에 몇 번을 다가가서 어슬렁대다가 그냥 물러
나곤 했었다. 엄마는 내가 자신의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맴을 도는 모습까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에이 씨팔! 나도 몰라. 이제 엄마가 알아서 해.
마지막보루堡壘인 나의 양심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추락하였다.
중학 3학년인 나에게 신은 너무나 가혹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신은 어느 누구에도
내가 본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나는 침묵했다.
일주일 후 아빠는 느닷없이 내게 저녁을 사주겠다며 기원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나는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빠가 돼지갈비 먹을래?라는 말을 했을 때
"네 알았어요.'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난 비굴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했던가.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잠시 동안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같은 현기증이 생겼다.
종종걸음으로 아빠를 따라 갈비집으로 들어간 나는 몸이 굳어 석고상처럼 될 뻔
하였다. 상상하기도 싫은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굳어버린 나의 팔을
잡아 당겨 자리에 앉혔고 여자는 나를 잘 아는 듯이 웃음으로 반겼다.
미친년 지랄하고 있네. 품에서 무성하게 자란 욕들이 목구멍을 들락날락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서푼아치도 안될 것 같은 알량한 자존심이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고 있었다.
여자는 대충 익었을 것 같은 고기를 내 앞에 슬며시 밀어 놓으며 얄팍한 입술에
미소를 담으려 하였다. 저 얼굴에 저 양심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개가 저절로 설레설레 흔들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인사 드려라. 아빠 친구야. 상당히 망설이며 꺼낸 말 같았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석쇠에 올려진 갈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안 먹어. 입맛이 없니? 여자는 조금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익은 갈비를 내 앞에
놔주었다. 나는 아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고기 한 점을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오물오물 몇 번을 씹었다. 여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검은 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남산여관에서 나올 때보다는 화장도 짙게 안한
것 같았다.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알 수없는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싫지는 않았다.
아빠가 이 향기에 반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기맛을 느낄 수가 없었고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였다.
"지우 너. 왜 울어?"
아빠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 때 문을 박차고 고깃집을 나와 버렸다.
아빠도 황급히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다. 나는 백 미터도 가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렸다. 아빠.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발꿈치가 저리도록 발을
땅바닥에 내리 찍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하나 둘 모여들었다.
아빠는 말없이 나를 안아 일으켜 세우더니 내 가슴에 등을 내밀었다.
업히라는 말 대신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툭툭 쳤다. 아빠는 기원 근처에 있는
덕수공원까지 나를 업고 갔다. 아빠의 등이 어릴 적보다 좁아 보였다.
아빠는 공원까지 가는데 20분 이상이 걸렸지만 말 한마디 내게 건네지 않았고
나는 석쇠에서 새까맣게 타 버렸을 고기가 너무 아까웠다. 오늘 못 먹었으니
나중에 아빠가 다시 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공원벤치에 나를 내려놓고 아빠는 말끝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비교적
소상하게 여자와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오랜만에 아빠가 진지하고 솔직해 보였다.
아빠는 며칠 전 가로수 뒤에 숨어 있는 나를 언뜻 봤다고 했다. 아빠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봐서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기원 근처에 있는 약속이라는 단란주점의 사장이라 했다. 원래 여자는
남편이랑 호프집을 하였는데 3년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약간의
보상금으로 지금의 단란주점을 인수한지 2년이 됐다고 하였다.
여자의 나이는 40살이라 했고 아빠는 여자의 단란주점을 들렸다가 알게 되어
일 년 전부터 친구로 지낸다고 하였다.
아빠는 말미에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다. 엄마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엄마도 알고 있다? 쉽사리 믿기지 않았지만 아빠의 표정엔 가식이 배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진지해 듣는 내가 미안할 정도였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땡땡하던 긴장감이 일시에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쭈그러들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에 대한 분노를 엄마에 대한 미움을 힘껏 배설하고 있었다.
아빠랑 말없이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어른들이 추구하는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지만 엄마가 침묵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빠에게
묻고싶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두 부자가 나란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몹시 흡족해 하는
것 같았다. 미웠던 엄마가 갑자기 불쌍해 보였다. 엄마는 바보가 아니였어.
분명 엄마의 저 깊은 마음속에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과 무던한 인내가 있을 거야.
그 날밤 나는 아빠로 인해 쌓였던 앙금을 풀고 제 2의 아빠여자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내가 인사를 하자 고마웠는지 자기 곁으로 오라며 손짓을 한다. 왜요?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갑을 열더니 만원권 한 장을 꺼냈다.
돈을 보자 조금 전까지 심란했던 마음이 쇼파에 앉은 듯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됐어요! 나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화투판에 머물던 아빠의 시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우야 받아라. 아빠 친구가 준 것이니 괜찮다. 아빠는 친구라는 것을
유난히 강조했고 두 달 전 공원에서 하던 말투와도 사뭇 다르다.
평정을 되찾은 것일까. 아빠의 목소리는 아주 편안하고 여유스럽게 들렸다.
고스톱을 치던 사람들은 한두 번의 고성이 오갔고 누가 잃었는지 누가 딴것인지
구별이 안갈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개업식은 여자가 준비해 온 듯한 술과 시장에서 배달해온 약간의 고기와 음식과 떡
그리고 엄마가 싸준 인절미가 식탐 많은 사람들 뱃속에 채워지고 무성한 패설稗說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이 났고 나의 중학시절도 끝을 맺었다.
명보기원은 지금도 명보극장 건너편 허름한 6층 건물 5층에 있다. 20여 평 공간의
모습도 중학 2학년 때의 것과 개업식 때의 것과 지금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바둑판도, 바둑돌도, 탁자도, 의자도, 철재캐비닛도, 찍찍거리는 오디오 카세트도,
문틀에 목을 맨 구두주걱도, 벽에 매달린 액자도, 시계도, 거울도 손때가 묻고
약간의 먼지가 쌓여 있을 뿐 옛날 모습 그대로다.
20여 평 연립인 우리집도 그대로 있다.화장실에는 아직도 아빠의 기저귀가 있으며
휴지처럼 버려지는 신문사 이름도 달라지지 않았다.
매달 월세를 내고 살고 엄마의 헤어스타일도 6년 전 그대로다.
약간의 살림살이가 바뀌었다지만 눈에 띄게 빛나는 살림도 없고 부서진 살림도 없다.
집을 오르는 철재 앵글로 만들어진 계단도 아직 건재하고 여전히 아빠의 행동도
답답할 정도로 굼뜨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아빠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과 14인치 칼라TV가 여자친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과 늙은 레지의 허벅지보다 하얀 전화기가 책상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약삭빠른 약속단란주점의 마담과 늙은 레지는 기원을 떠나 버렸지만
기원의 물건들은 지금도 아빠만큼 굼뜨고 누나의 옷과 헤어스타일은 아빠의 머리처럼
빛나고 있다.
덧; 2000년 칠월 초 이틀. 낡은 책상 서랍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사진 속에 아빠는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밝게 웃고 있었고 하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전역을 기념하며...196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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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 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