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히 포개져 있던 꽃은 누가 볼세라 매일 밤마다 피어 달님 만나 어둠 속에서 몰래 사랑을 나눈다. 아침이면 힘없이 스르르 꽃잎 접고 마는 달맞이꽃이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듯 아쉬움 감추지 못해 사랑하는 님 떠난 지금 이 시간에도 활짝 피어 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짓는 그 이름 달맞이 꽃......' 앞못보는 가수는 구슬픈 가삿말로 감성 예민한 처자의 가슴을 울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종일 꽃잎 펼치지 않고 밤에만 피는 이 꽃을 보고 있노라면 이루지 못할 안타까운 사랑을 하는 것 같아 애처롭기만 하다. 눈으로 안고 가슴으로 느끼며 마음의 창을 열어 소담히 담아내는 아름다운 아침 풍광이다. 입추지나 말복까지 모두 치룬 여름의 끝자락 새벽공기는 맛깔스런 상차림 같기만 했다. 푸짐한 밥상 가장 먼저 차지하는 듯 기분좋게 시작하는 아침이다. 출출한 새벽녘 풀섶의 미미한 풀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 눈속에 담아 가득 채우며 씩씩한 걸음걸이로 공설운동장까지 향한다. 빠른걸음으로 집에서 운동장까지 왕복 40분을 걷고 운동장 몇바퀴 뛰고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그런 뒤 집에 돌아와 차가운 물로 정신이 번쩍 나도록 한번 뒤집어 쓰는 그 시원함의 뒷맛은 운동후 개운함을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내 몸의 싸이클이 전혀 마음에 들지않아 다시 시작한 새벽운동, 운동장까지 가는 길목에 오며가며 한번씩 꼭 들르는 집이 있다. 자그마한 텃밭들이 오밀조밀 가꾸어져 있는 가구 수가 몇 안되는 동네에 우리가 몇달 전 잠깐동안 키우던 강아지를 준 집이 있다. 큰 덩치에 비해 무척 겁이 많고 유순해 보이는 귀가 축 처진 외국산 잡종 이었다. 두어달 키우다가 자그마하게 꾸며놓은 꽃밭을 모두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마당 있는 집에 주어버렸다. 그 동네가 아침마다 가는 길목 이였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수 있으랴... 개는 3일을 길러도 3년 공은 안다고 하지 않던가. 운동 첫날 내가 부르는 소리에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을땐 눈물이 나올만큼 가슴이 찡했다. 달포만이긴 하지만 몰라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기 전 부터 두근거리는 마음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리워하다 만난 연인처럼 알싸했던 그 기분,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는 심정을 사람들은 이해 못하지 싶다. 운동 나흘째 .. 동네 담벼락에 꽃잎 몇 개 달려있지 않는 능소화며 박꽃과 호박꽃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호박 몇 개가 잎 뒤에 숨어 살짝 얼굴 내밀고 있다. "금동아~~~~~" 운동을 마치고 내려오니 고샅길 끝 마당에 멋진 폼 잡고 위풍당당 서 있다. 긴꼬리 치켜들고 한없이 반긴다. 이른 아침이라 어른들은 집안에 계시는지 보이지 않고 나는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개를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려 준다. 그 모습을 어떤 할머니가 지켜보고 계셨다. "금동아..가만있어, 내일올게 잘 있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혼자 하면서 손을 흔들며 나오는 나에게 할머니가 말을 부친다. "개 원주인인가벼...." "예...저희집 개였어요." "옥상에서 키웠다는데..." 낯선 개가 한마리 마당에 묶여져 있으니 동네이웃으로 궁금도 하였으리라. 두손 뒷짐지며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듬성 난 이를 보이며 내게 웃음을 던진다. . "호박 한개 드실라우?" "예?" 숨어있는 호박 하나 따고 싶었던 내 마음을 들킨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가는 길 두부 한모 사려고 했던 차에 생각지도 않았던 호박이 이른아침부터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이 원흉이었다. 처음 만난 내게 방금 딴 것이라며 먹으라고 건내주는데 그 고마움을 어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시골인심이 좋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집 개 주인이였다는 반가움에 호박 하나 건내주었나보다. 연신 고마워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손가락질을 하신다. 뒤돌아보니 금동이가 사는 집 노부부가 마당으로 나와 나를보며 환히 웃고 계셨다. 살짝 허리숙여 인사 드리고는 등을 돌렸다. 청청한 아침하늘과 소담스런 채마밭으로 둘러쌓인 작은동네.. 도회지 한켠에 자리한 시골인심이 사방으로 뻗치는 햇발처럼 내 마음속에 큰 자리로 머문다. 삼복을 무사히 보내고 건강히 있어준 아니 지켜주신 분들께 고맙기도 하고 아무연고없는 내게 호박 한덩이 주신 할머니의 따뜻한 정에 내일은 지나치면서 막 나온 뜨끈뜨끈한 두부 몇 모 사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두부가게 들러 한창 만들어내고 있는 두부 한 모를 샀다. 호박과 풋고추 그리고 뜨끈한 두부를 듬성듬성 썰어 보글보글 끓는 된장에 집어 넣으니 그 구수한 찌개내음이 인심좋은 할머니로 인해 더욱 맛있는 아침 상이 차려졌다. 넝쿨없는 호박 넝쿨째 들어온 듯한 푸근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