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만에 첫 여름 피서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감개 무량했다.
결혼 첫 해 여름 갓 임신인 걸 알게 되어 조심하느라 여행 포기, 다음해는 갓 태어난 신생아를 데리고 갈 엄두가 안 나서 또 포기, 드디어 3년째 여름 휴가를 맞아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휴가를 받아 놓은 주말인 토요일 오전에 후배들과 난데없이 축구를 하겠다며 일찌감치 집을 나선 남편이 축구를 하다 심한 골절상을 당한 것이다. 그날 오후 갑자기 후배에게서 응급실이라며 연락이 왔다. 그 해가 다름아닌 월드컵의 해였다. 그 붐을 타고 워낙 축구를 즐겼지만 직장생활로 한동안 안 하다가 갑자기 그것도 비 온 다음날 미끄러운 땅에서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었다. 의사가 어떻게 축구를 하다 이렇게 심하게 다칠 수 있었냐고 할 만큼 심한 부상으로 수술을 하고 휴가를 고스란히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수술할 때 박아 놓은 심을 빼는 수술을 하느라 또 휴가를 몽땅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올해 드디어 우린 떠난 것이다.
과연 이번엔 성공할 것인가...내심 약간의 불안마저 들었다.
그래서 계획을 아주 앞서서 세우지도, 거창하게 세우지도 않았다. 그렇게 미리 설레하거나 들떠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가려니까 뭘 해도 해 본 사람이 잘 한다고 막막하기도 했다.
나는 여행을 처음 가는 셈이니까 이왕이면 유명한 곳으로 가자고 했고 남편은 주변에서 추천을 받았다며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섬을 들먹였다.
그게 바로 장봉도라는 곳이었다.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라고 했다.
동해는 성수기에 아직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가기엔 엄두가 안 났고 서해 쪽에서 유명한 곳들 중 하나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내심 불만스러웠다. 왜 하필 들어 보지도 못한 섬이람...
인터넷으로 남편이 예약했다는 콘도형 민박 일명 장봉 연가라는 곳을 들어가 보자 조금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 한적한 섬 조개구이 해수욕장 깨끗한 숙소... 어쨌든 갔다 오는 게 어디냐 싶고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종도까지 가 본 적이 없어서 가다가 약간 헤매고 자동차를 타고 배에 오르는 첫경험을 시작으로 우리의 여름 휴가 여행은 실현되기 시작했다.
배에서 갈매기를 보고 바다를 보며 그동안 잡아 매 놓았던 마음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가게 될 장봉도라는 곳의 지도를 보며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다 보니 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올 때는 전혀 몰랐는데 장봉도와 영종도 사이에 한번 들르는 섬이 있었는데 신도 시도라는 섬이었다. 그곳에 풀하우스 세트장이 있다는 플랭카드가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약간 유치한 취향을 가진 나의 호기심을 확 자극하는 정보였다.
남편에게 돌아올 때 그 섬에 들러 풀하우스 세트장을 꼭 보고 가자고 제안했고 남편도 동의했다.
한적한 섬에서 하루 밤 묵고 놀다가 가볍게 돌아오는 게 다일 줄 알았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너스를 선사받은 느낌이었다.
뭔가 코스가 생기는 것 같고 이벤트가 덧붙여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장봉도라는 섬 역시 매력적이었다.
소위 해안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섬을 한차례 죽 둘러 보는데 30여분이면 족한 아담하고 아직 때묻지 않은 섬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제 막 때 묻기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섬이라고 하는 게 나을까?^^ 여기 저기 한창 민박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어쨌든 예약한 숙소도 마음에 들었다. 이쁘고 깨끗하고 넓었다.
난 여행을 그리 즐기지 않아서인지 고생하는 게 싫다.
잠자고 씻고 먹는 건 쾌적하고 깨끗하길 바란다. 그래서 숙소를 보자 만족도가 또 한번 팍 올라 갔다.
게다가 아직 때묻지 않은 덕분인지 숙소 주인 혹은 관리인도 인심이 좋고 친절했다. 마당에서 맘대로 호수로 세차할 수도 있었고 (마침 배에서 갈매기가 차에 똥을 싸 놓았기 때문에 어찌나 고맙던지..) 마당에 심겨진 여러 채소들을 맘대로 따 먹어도 된다고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섬을 돌아보자고 나섰다.
가다 보니 몇 사람이 놀고 있는 갯벌이 있어서 차를 세우고 놀았다.
딸과 아이 아빠만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놀았고 난 사진을 찍으며 구경했다.
진흙을 몸에 바르기도 하고 수영도 하고 갯벌에 있는 살아 있는 물고기나 조개류들을 찾아 관찰하며 특히나 딸 아이는 신나했다.
좀 떨어진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호미로 돌 틈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게들을 잡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게는 열마리도 훨씬 넘는 게를 낚아 내는 수완 좋은 아줌마도 구경했다. 난 어쩐지 뭣도 모르고 물었다가 졸지에 잡혀 버린 그 많은 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는 아주 작은 멸치떼가 떼지어 헤엄쳐 다녔는데 손으로 물을 휙 하고 퍼내기만 해도 여러 마리가 올라 왔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어쨌든 구경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조개구이를 먹으러 해수욕장 근처 식당으로 갔다. 바다를 바라보며 조개구이를 먹었다. 오히려 보기에 멋스러웠던 소라는 맛은 영 형편없었지만 작은 조개 큰 조개들이 입을 딱딱 벌릴 때마다 살을 발라 먹는 맛과 재미가 색달랐다.
썰물 때라서 바다엔 사람들이 없었다.
섬인데도 곳곳에 포도와 옥수수가 많았다. 밭농사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포도가 유명하다고 했다.
숙소에 와서 쉬면서 가져 온 스케치북에다 아이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여러 장을 뚝딱 뚝딱 그렸다. 바다에서 노는 그림, 자동차를 타고 배를 타는 그림, 그리고 이것저것 신나게 그려댔다.
그러면서 좀 쉬었다.
저녁때는 숙소 화단에서 상추 고추 깻잎 옥수수 몇개를 따 와서 삶고 쌈을 싸서 먹었다. 가져온 몇가지 반찬에다 밥을 지어서....
삼겹살을 좀 가져 올 걸 그랬다는 약간의 후회가 들었지만 이것 또한 첫 여행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이 오히려 뿌듯하고 감사했다.
아쉽게도 구름이 끼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첫 휴가지에서 그렇게 밤을 보낸다는 것만으로 감개무량했다.
아침엔 저녁에 먹던 대로 남은 음식을 대강 먹고 짐을 정리하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밀물 때라서 어제와 사뭇 다른 바다였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들어가도 기껏 허리에도 채 물이 차지 않았다. 아이는 어제 못지 않게 튜브를 타고 깔깔대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신나게 몇시간을 놀았다.
점심 때가 다 되었지만 드디어 풀하우스 세트장을 보러 가자는 부푼 기대로 서둘러 고픈 배를 움켜 쥐고 배를 타고 도중에 신도란 섬에 내렸다.
풀하우스 세트장은 생각보다 선착장에서 꽤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 시도라는 또 다른 조그만 섬에 있었다. 뙤약볕에 아이까지 잠들어 힘들었지만 특별한 추억을 만들수 있다는 일념으로 세트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침 스탭이 막 도착해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집 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약간의 실망을 감추며 그냥 집 주변이라도 둘러 보고 가자고 둘러 보다 보니 드라마에 나왔던 인상깊던 그네에도 아이를 앉혀서 슬쩍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여기 저기 집 주위에도 예쁘고 볼만한 게 많았다. 그렇게 스탭들 눈치도 보며 사진을 찍으며 집안도 어떻게든 한번 기웃거리며 돌아 나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 서 있었다.
무심코 돌아가려던 우리는 주인공들이 도착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던 걸음을 돌려 우리 역시 그 무리에 합류해서 기다렸다. 곧 까만색 차가 한 대 오더니 송혜교가 내렸다. 이어서 또 한대의 차에서 비가 내렸다. 난 비록 옆모습이지만 그 스타들을 한 장씩 찍는 데 성공했다.
송혜교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대로 자그마하니 귀엽고 예쁘고 뽀얬고 비는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멋있고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다.
드라마에서 하도 집이 이쁘길래 집이나 구경할 셈으로 갔는데 생각지 않게 두 주인공까지 보게 되다니 집안을 둘러 보지 못한 아쉬움은 온데간데 없었고 또 한번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흥분한 우리는 그 뙤약볕을 그저 뿌듯해하면서 걸어 나왔다. 배 고픈 것도 잊은 채...
그렇게 해서 다시 배를 타고 돌아 온 것이 우리의 감격스러운 첫 여름 휴가 여행기이다.
짧디 짧은 1박 2일이지만 기대하고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흡족하고 알찬 일정이었다.
갔다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만 한 우리의 첫 여름 휴가...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리고 집에 와서도 나는 '성공!' 이라고 외쳤다. 남편과 함께....
내년에는 동해로 조금 더 긴 여행을 가자고 남편이 말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설사 멀리 못 가도 거창한 휴가가 아니라도 가족끼리의 휴가가 허락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된다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 여름이면 으레 휴가를 떠나고 놀러 가는 게 당연한 것이 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축복인지 잊지 않도록 올해 이 뜻깊은 여름 휴가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