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아파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연한 실구름 흐르는 하늘도, 꽃과 나무를 어루만지고 돌아오는 바람도 제대로 느껴볼 수 없기 때문이죠. 편리하지만 삭막한 도시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씩 고향 생각에 애잔한 그리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그 옛날 어깨에 삽을 메고 땀투성이로 논에서 돌아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스라한 고향 풍경과 맞물려서 떠오릅니다.
뜨거운 8월의 햇살 아래서 끈덕지게 땀이 흐르던 작년 여름. 우리 가족은 의기투합하여 몇 년만의 가족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홀로 남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간 곳은 양평의 사나사 계곡. 이제는 호호 할머니가 된 어머니께서는 연신 아이처럼 함박 웃음을 띠고 즐거워하셨습니다.
늘상 댄스곡과 발라드를 틀어대던 우리집 차는 생전 처음 구전 민요 '정선 아라리'를 구성지게 쏟아냈습니다. - 아리랑 아리랑이 얼마나 좋은지 밥 푸다 말고서 어깨춤 춘다..- 음악에 맞추어서 신나게 어깨를 들썩이는 어머니.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땐 멀미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너무나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나사 계곡은 처음 찾아간 곳이었는데, 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과 낭랑하게 흘러오는 독경소리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왜 이런 곳을 진작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시는 어머니이기에 잘 닦여진 산책로에서도 오랜 시간 쉬엄쉬엄 발을 떼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오히려 더 정다운 느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끊이지 않고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가 뜨거운 태양을 잠재울 만큼 시원스러웠습니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바위 안 구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아담한 사나사 절을 둘러보았습니다. 먼저 부처님 곁으로 가신 아버지 생각도 떠올려보았고, 답답한 도시생활을 벗어나서 이런 곳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구경을 마치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던 저녁, 갑자기 앗!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몸이 갸우뚱 기울어지더니 그만 길바닥에 푹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발을 잘못 놀리셨는지 심하게 삐었던 것입니다. 재빨리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드렸지만 이미 어머니 얼굴은 크게 찡그러져 있었습니다. 아이 아파, 아이 아파 보채시는 어머니께서는 어느새 아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이 등을 내미는 것을 뿌리치고, 저는 어머니를 업어드렸습니다. 그 옛날 저를 업어주셨던 단단한 어머니의 등을 대신해서 이제는 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어머니를 업었습니다. 눈물이 비죽 흐를 만큼 어머니의 몸무게는 가벼웠습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어머니를 업고 저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는데, 어머니께서는 뭐가 그리 좋으신지 구성진 노랫자락을 뽑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제 등에 얼굴을 비비며 "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젠 정말 갓난 아기가 되어버리신 어머니...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든 어머니를 바라보며 연신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부채질을 해드렸습니다. 얼굴은 주름투성이, 손 마디마디는 굽고, 검버섯은 온 몸에 드리워졌습니다. 왜 진작 어머니 모시고 이런 여행을 자주 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서 고향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의 외로움이 작은 몸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베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어머니의 다리는 많이 나아지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아프다 아프다 아기처럼 엄살을 부리셨습니다. 아마도 가족 모두의 관심을 받는 것이 즐거우신 것이지요. 저와 남편 그리고 다 큰 두 딸은 이런 할머니의 투정을 웃음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가족이 번갈아 가며 어머니를 업고서 다시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제가 땀이 흐르면 남편이 어머니를 업고, 남편이 힘들어하면 두 딸이 할머니를 부축했습니다.
도토리국수집에서 별미인 묵탕국을 맛보고, 유형문화재 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를 구경하고, 푸른 소나무 숲에서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 바람을 즐기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길.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에는 뜨거운 여름을 거뜬히 보내고도 남을 맑은 에너지가 충족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주차된 차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는 차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 잘 부탁혀. 사고치지 말고 얼렁 가장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우습고 기막혀서 "뭐하시는 거예요." 하고 애꿋은 핀잔을 하였더니, 어머니 왈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꾸 말 걸어주고 정 붙여줘야지 더 오래 가는 법이고, 더 오래 쓰는 법이라고---. 지금도 이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작년 8월 뜨거웠던 여름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된 사나사 여행. 어머니와 함께 한 그 여행의 추억을 올 여름에도 되살려 보려 합니다. 8월에 간다는 여행 날짜에 벌써 들뜨신 어머니께서는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하셔서 뭐 챙길 것은 없는지 물어보십니다. 그러면서도 괜히 " 니들 바쁘면 가지 말어. 나는 뭐 만사 다 귀찮응께."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꼭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가족여행을 떠날 생각입니다. 또 한번 어머니를 등에 업고 거닐어 보고 싶습니다.
제 여행기가 조금이나마 사나사의 아름다운 풍경과 소슬한 멋을 전달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한번쯤 부모님과 사나사 여행 계획을 세워보세요. 관광객이 적고, 도로 정비가 잘 되어있고, 자연이 멋스러워 한번 가면 꼭 또 찾게 만드는 곳입니다. 수도권이니 더욱 편안하게 다녀오실 수 있으실 것 같네요. 올 여름 휴가지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