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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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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BY 개망초꽃 2004-04-30

그 사람은 연두색을 제일 좋아했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어릴때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보라색 붓꽃을 봤는데
아스마한 보라색 꽃에 반해서는 그 옆자리에 작은 바위가 되어 붓꽃 바람막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걸 시작으로 물방울이 모여 샘물이 되고 실또랑이 흘러 아기자기한 냇물이 되고
느긋한 강이 되듯이 그때부터 쭈욱 보라색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어린시절엔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마저 서울로 살길을 찾아 떠나시고
학창시절엔 너무 내성적이라 항상 혼자였고 떨칠 수 없는 외로움에
저 너머 먼 산을 보는 것이 내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산너머 제일 먼산은 회색빛이 감도는 보라색이었다.
초록색과 회색빛이 조금씩 감도는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인 보라색 산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조각상 같았고 찬 우물물에 세수를 한 듯 산뜻했었다.

커가면서 알게 되었지만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격과 직업에 관해 나왔는데
직업은 예술가가 많고 성격은 약간 치우치는...다시 말해 정신이상자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난 그때부터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더 큰 이유는 보라색을 좋아하면 외롭다고 해서지만...
외로움이 지겨웠다.
외로움이 옷이라면 벗어서 입혀 주고 싶었고,
밥이라면 푹 퍼서 나눠주고 싶었고,
꽃이라면 톡 꺾어 건네주고 싶었다.
이렇게 외로움이 진저리날때쯤에 믿거나 말거나 하는 바람처럼 떠도는 말을 듣고서
보라색 옷은 입지 않았고 보라색 가지는 먹지 않았다.
봄이면 연보라색 꽃마리 꽃이 이쁘고
여름엔 청보라색 달개비 꽃이 이쁘고
가을엔 흐느적거리는 밝은 보라색 쑥부쟁이 꽃을 좋아했었는데
이룰 수 없는 사랑처럼 보라색꽃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로만 했다.

그런다고 태고난 팔자가 달라질리가 없었다.
여전히 난 외롭고 외로움에 울었고 외로움 때문에 야생성이 되어 버렸다.

보라색 다음으로 좋아했던 색이 초록색이었다.
자연에 관심이 많고 산골짜기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서 그런지
초록색을 보면 포근한 고향품에 안거하는 거 같았다.
화를 참을 수 없어 밥도 못먹고 잠도 오지 않아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도
초록풀이 무성한 오솔길이나 자연학습장이 있는 호수공원을 거닐다 오면
밥도 잠도 머리도 원래대로 돌아와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시 그 사람과 편지를 쓰면서 그 사람이 연두색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난 보라색도 잊어버리고 초록색 계열인 연두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외롭지 않았고
세상이 달라 보였고 소녀적 꿈으로 돌아가서는
짧은 치마에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고
연두색 초원에 앉아 그 사람과 네잎 크로바를 찾는 꿈....연두색 꿈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은 떠났다.
그 사람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커다란 책가방에
연두색 꿈도 꼬깃꼬깃 꾸겨 집어 넣더니 지하철을 타고 떠났다.
떠나버린 지하철 철로 위엔 두 가지 선만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뒤돌아 가던 선과 내가 홀로 걸어가야하는 선.

난 다시 보라색을 좋아한다.
회색빛이 감싸도는 먼먼 산 보라색이 좋다.
어둠속 비에 젖은 가로등밑 푸른 보라색이 서글프다.
연한 보라색 꽃마리 꽃이 뜰마다 시멘트 틈마다 지금 한창이다.
눈두덩이 위에 보라색 아이샤도우를 바르고
모니터 백지위에 커서처럼 눈까풀을 깜빡깜빡 깜빡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