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가 24년만에 나왔다.
삼십대 초반쯤 잠시 만난적이 있었지만
그땐 처녀때나 별로 달라진 세월이 아니여서 그리 늙음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귀밑으로 2센티를 넘기지 못하던 단발머리에
하얀칼라 풀먹여 세우던 교복을 입고
앵두꽃 하얗게 부서지던 뒷교정에 앉아
제1회 대학가요제에 실렸던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노래를 부르고
공부시간에 폭풍의 언덕을 돌려 가며 읽었던 여고친구 넷.
중년이 되어 우리 넷은 다시 뭉치기로 했다.
일박이일로 부산으로 기차여행을 가기로 했고
남이섬이든 강촌이든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을 실컷 찍기로 했고
미국에서 온 친구와 일주일동안 하던 일을 잠시 미뤄두고
여고시절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근데 걱정이다.
왜 나만 더 늙은 것 같은지...
촉촉하고 탱글거렸던 피부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푸석거리고
눈가에 잔주름은 오래된 이야기고 입가에 패인 굵은 주름은 언제 생긴건지...
몸의 기름은 다 빠져 나가고 가죽만 남아가지고,에휴~~~
일단 미장원으로 가서 앞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했다.
흰머리가 너무 많아 포기하고 안뽑았는데
거울에 매달려 얼굴에 인상을 써가며 흰머리를 논바닥에 피를 뽑듯 사정없이
뽑아서는 화장실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한달에 한번도 안하던 맛사지를 일주일사이에 두 번이나 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친구가 온다는 날은 다가오고...
공항에서 우리 넷은 만났다.
미국에서 온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살 많이 쪘지? 못알아 보겠지?"한다.
"아니야 살은 쪘지만 이쁜 모습은 그대로네."
"정말? 에헤헤헤... 너도 그대로 날씬하고 이쁘다."
우린 서로 마주보며 24년만에 만난 친구의 순조로운 만남과 기분을 위해
서로 늙어감을 위로하기 위해 사탕 듬뿍바른 말을해야만 했다.
그래, 열아홉살에 헤어져 마흔네살에 만났는데 어찌 안 늙고 살아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세월의 흔적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고
세월 앞에선 무엇이든 영원한 것이 있겠느냐 말이다.
미국에선 온 친구는 뚱뚱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살이 두덕에게 붙은 턱이 두 개에다가 눈가에 굵은 주름이 빗살처럼 뻗어 있었고
두꺼운 뱃살과 실룩거리던 엉덩이와 무릎이 아파서 관절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다른친구도 마찬가지로 얼굴에 검버섯은 피어가지고 자기가 제일 안 늙은 줄 알고 있었다.
"그래,네가 제일 안 늙었어.여고때 그 모습이야."
또 한 친구도 모든사람들이 자기를 십년은 젊게 본다고 하길래
"그래 넌 피부가 고와서 그렇게 보여."하고 기분 좋게 띄어 주었다.
그 흔한 통속적인 말처럼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우리는 두 번하고도 더 변한 세월을 살았는데
그대로일 수가 없다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
다만 몇십년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서로의 우정의 윤택함을 위해
내 스스로도 내가 늙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겉과 속이 다른 말로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는
여고시절 추억이 제일 잊혀지지 않았다면서
타국에서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친구들을 그려보면서
여고시절 추억을 야금야금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몸도 소녀로 머물러서는 만나는 사람이나 친구들마다
물어보는 말이 내 얼굴 알아보겠어? 나 늙지 않았지? 저 몇 살이나 돼 보여요?
그러면 다들... 그럼 그대론데,세월이 빗겨갔나 봐, 음...서른초반이나 중반쯤? 그런다.
우린 겉모습은 분명 중년이었다.
그러나 우린 열아홉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