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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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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집(3)


BY 리베 2004-03-06

 눈이 100년만의 폭설로 내려도... 그래도 3월은 겨울이 아니라 봄입니다.

살을 에이는 바람을 동반한 영하 5도되는 날씨라도 동장군 얘기는 물러간 지 오래인...그 추위의 이름도 '꽃샘추위'니까요.

 

 꽃피는 춘삼월 첫째날....

 이렇게 춥지도 않고 눈도 없던 정말 햇볕이 유난히 따사롭던 날...

바로 며칠 전... 기찻집 할아버지의 생신이셨습니다.

'할..아..버..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제 마른 가슴에 눈물부터 고이지만 진작 할아버지의 생신이라는 걸 안 날은 생신 바로 전날 친엄마 대타역을 자청하는 세째고모의 전화를 받고서야 겨우 손을 꼽아볼 수 있었습니다.

 

 흔히 '여자가 남자를 쫓아다녀 결혼하면 안된다'라는 어른들의 말처럼...그 하지 않았어야 할 불문율을 어긴 원죄의 댓가로....기찻집 할아버지 생신이라 아침 일찍 밥을 먹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차마 자신있고 당당하게 남편에게 전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눈치를 보며 아주 어렵게 말문을 뗄 수 있었습니다.

 

'내일...할아버지 생신이래...아침 일찍 밥먹으러 오라는데....?'

 

 남편은 그나마 기본적인 교양은 갖춘 사람이라 내놓고 싫은 티를 낼 때와,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때를 '남편 기준'으로는 적절하게 구분지어...다행히 이번엔 후자의 카드를 제시해 주더군요.

 

 아침 일찍... 졸린 아이들을 앞세워 서둘러 기찻집엘 갔습니다.

팔순으로 접어드신지 오래이신 두 분이 사시는 곳에 오랫만에 온 자식들이 모여 복작복작 상다리가 부러져라...차려져 있었습니다.

 제 아빠가 맏이셨기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맏이 노릇을 일부 하고 계신 둘째 작은아버지의 지휘로 30명이 약간 안되는 대가족의 아침식사는 그 분의 열성적인 믿음 덕에 식사전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오늘, 아버님의 생신을 맞이하여 부모님의 건강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저도 워낙 어렸을 때부터 다닌 교회라 아직도 급할 때면 '하나님...'부터 찾지만 팔순 노부모 제대로 찾아뵙지도 않으면서 그리도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아대는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의 신앙의 원천은 대체 어디인지...제 혼자 맘에 아침부터 그 신앙에 은근히 시비가 걸리더군요.

 

 아침밥을 먹은 후엔 그 대가족들은 각기 자리를 잡고 후식과 과일과 각자의 얘기를 나누며 잠시 시간을 보냈습니다.

 12시도 되기 전... '바쁘다'는 공통적인 이유로 차 7대에 나눠 탄 가족들은 자주 가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했지요.

 작은 댁 두 가족은 모두 원주에 계신 이유로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각자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매년....언제가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불안한 생신을 올 해 그런 절차로 비교적 간단하게 마쳤습니다.

 

 우리가 원주로 이사를 가 버리면...그 기찻집을 친정이라고 인정조차 안하는 남편을 또 어떤 식으로 설득해 찾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10분 거리에서조차 발걸음 하기가 어려운 실정에 비추면....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뵙는 건....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반기실 모습을 뵙는 건...

제 아이들을, 예전에 저를 보실 때처럼 그 인자하신 표정으로 바라봐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마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 기찻집에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저리고 아파옵니다.

 

 남편을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아서...

시댁만을 고집하는 남편의 이기심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항상 그 기찻집과 남편의 감정이 마찰이 되면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저조차 몸을 사렸는데....

 시어머님까지 한술 더 뜨셔서...아예 친정에 가지 말라 하시는데...

 

무엇이 도리이고 무엇이 '효'인지....

 

오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100년만에 눈이 많이 온 날...아예 교통이 통제되었다는 그 먼길을...굳이 아무 이유없이 매 주 가는 시댁에 이번에도 꼭 가야만 하겠다는 남편의 그 '효심'을...

 

꽃피는 춘삼월에 생신을 맞으시는 우리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집니다.

 

눈이 100년만의 폭설로 내려도...그래도 삼월은 겨울이 아니라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