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를 아시나요?
동백꽃이 눈물처럼 떨어진다는 선운사.
당아욱을 아시나요?
시골집 뜰가에 피어 있던 애기 접시꽃 같은...
비가 흩뿌리던 날에 선운사를 갔었지요.
오래된 벗나무와 오래도록 흘렀을 계곡과
선운사 입구 비에 젖은 자귀나무와
그리고, 절 초입 시골집 화단에 진하게 피어있던 이 꽃.
선운사의 동백숲을 보고 돌아나온 비개인 오후에
꽃씨를 받아 왔지요. 휴지에 돌돌 말아서는...
다음해, 봄... 질그릇 화분에 씨를 심었지요.
기다리길 며칠... 싹이 나고 잎이 한가닥씩 붙고,
드디어 꽃이 피었어요.
그러나... 선운사 시골집에서 본 그 꽃이 아니였지요.
짙은 자주색도 아니였고
힘이 없이 슬쩍 피고선 금방 시들어 버렸지요.
알아요.
있을곳에 있지 못 해 제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도 그래요. 자기 길이 있지요.
그래야 내 색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
이제 그만하자 할때까지 당아욱을 질그릇 화분에 심어놓고 널 기다렸어.
막연한 기다림을 너도 알면서 모질게도 내 말을 씹어 버렸고
조건없는 사랑을 잡기 싫다는 너의 손에 쥐어 주고서는
뒷마당 잔디에 앉아 죄없는 풀꽃만 갈기갈기 찢었지.
너 때문에 목이 조여 울부짖어도 넌 우는게 지겹다고 했지.
더 이상의 이어짐은 너와 나에게 상처만 된다고,
여기서 끝내자고 이 자리에서 앞서나갈 용기가 없다고,
전화기 저편에서 허탈에게 웃으며 말을 했던 걸 넌 대수롭지 않게 잊었겠지만...
둘이서 우산 하나를 들고 선운사를 찾던 순간이 동백꽃처럼 선혈한데,
산사로 돌아나오던 초입엔 자귀나무꽃잎이 빗물에 젖어 후줄근한데,잊었다고 말하다니
당아욱 꽃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우리집 앞마당에 심어놓자고
씨를 받아서 꼼꼼하게 휴지로 싸서 내 가방에 넣어 주었던 날은 거짓은 아니였을거야.
사랑이 변한게 아니고 사람이 변한거라고...
알아, 사랑이란 아름다운 존재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사람이 그걸 거부하고, 한여름 날씨처럼 변덕을 부리고...
사람에겐 선천적인 권태의 피가 흘렀던거야
당아욱은 11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신을 쪼개어 자식을 낳았어.
거친 흙을 뚫고 나온 새싹을 봤을땐 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더라.
너에게 소식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지만 넌 분명 시큰둥하게 그래 잘 키워봐 할게 뻔해서
그만 두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루종일 새싹과 눈을 마주했어.
내가 전화를 안해도 넌 기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
내가 아파 누워 있어도 넌 며칠지나면 일어나겠지 했을거야.
내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을 해도 남처럼 의무적으로 병문안을 왔을거고
내가 너로 인해 목숨을 버렸다면 그때는 겁이나겠지.
여자의 한이 너의 앞날을 막아버릴까봐. 단지 그럴까봐 내가 죽고싶다고 말했더니
나라는 나쁜놈 때문에 왜 죽냐고 소리를 질렀던거야.
당아욱이 자라는 속도가 고속도로 같았어.
내 고향엔 대나무가 없어서 비운뒤에 숙순처럼 자란다는 표현을 실감하지 못하지만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왔던거야.
당아욱은 잎사귀가 아욱같아. 그래서 아욱이란 뒷이름이 붙었을거야.
성은 당이요 이름은 아~욱~~ 히히히... 유행가 가사가 떠올라서...
꽃몽오리가 생기던 날은 가슴이 조여들더라.
꽃도 피기 전에 영양분이 모자라 떨어질까봐서...
손바닥 같은 당아욱 잎사귀 사이로 꽃은 드디어 피어난거야.
너는 없어도 아침이 오고 날이 가듯, 필 꽃은 피고 질꽃은 지겠지...
그러나 실망했어. 우리가 보았던 그 꽃 색이 아니였어.
햇볕에 바랜 보라색 와이셔츠 같았어.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종이꽃이 이럴거야.
그래 너가 없는데,네가 받아내고 네가 싸주던 너와 나의 꽃씨였는데,
너는 이미 떠난후인데...
나도 다 알아.
땅의 정기를 받고 햇볕 실컷 받아 먹고
비바람 뒤집어 쓰고 하늘도 실컷 봐야하는데 그게 부족했던거야.
그래야 제 모습 그대로를 표출해 냈을텐데...
나도 이젠 알아.
너가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고 남쪽나라였어.
겨울에도 동백꽃이 생리처럼 물컹물컹 피어나고,
봄이면 자운영꽃이 논바닥에 자리깔고 앉아있고,
여름이면 당아욱꽃이 시골 화단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던 남쪽.
넌 그곳을 버릴 수가 없었을거야.
우리 사랑은 버려도 너의 본향은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걸 이제 나는 알아.
당아욱을 아시나요?
비갠인 오후, 선운사 가는 시골 마당에 피어 있던 자주보라색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