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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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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경기 첫날


BY 달맞이 2004-02-02

몇년을 벼르고 별러 서울 가기로 맘먹고

남편을 대동하고 기차표 예매하고 내려 올때 탈 항공표는 남편 마일리지를

양도 받아 공짜로 (공항이용료 4,000원) 티켓 예매를 했다.

드디어 아들도 2박 3일 일정의 교육을 떠나고 나도 서울로 출발했다.

날짜를 잘못 아는 바람에 아들이 하루 먼저 떠났다.

9시 20분 출발 하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인  수원을 향해서..........

서울로 먼저 갈 예정이었으나 안양 언니 집에 먼저 들리기로 했기때문에

수원표를 끊었다.

점심도 굶고 수원에 2시 20분에 도착 기다리던 언니를 만났다.

우리집에 다녀간지가 3년 정도 됐으니 3년만에 만났다.

고생을 많이 한탓에 자그마한 키가 더 작아 보엿고 더 늙어 잇었다.

수원역 2층에 올라가서 늦은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의논끝에 정릉에 있는 외삼촌댁에 먼저 가기로 결정 하였다.

지루한 지하철 한시간 반

마을 버스 타고 보건대학 앞에 내리니 칠순의 외숙모가 마중을 나오셨다.

외삼촌은 동생결혼식때 뵈었지만 외숙모는 10년만에 만났다.

음식솜씨 좋은 우리 외숙모.. 까탈스런 외삼촌이랑 티격태격 같이 해로 하고 계신다.

그 연세에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 하고 계시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조그만 빌라 일층에 살고 계셧다.

들어 섯더니 백발의 외삼촌이 반겨 주셨다.

" 살다보니 니들도 다 만나고 웬일들이냐?"

언니는 20년 만에 외삼촌을 만났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죄송스럽고 미안하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는 구차스런 변명조차도 할수 없고

그저 난 언니가 성질이 못되서 그렇다고 독해서 그렇다고 몰아 부쳤다.

"이렇게 너 만날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며 언니 손을 붙잡고

고생 했다고 위로하시며 고맙다고 되풀이 하시는 외삼촌.

유일한 외가쪽 생존자시다. 다 단명하신탓에  칠순의 외삼촌이 그나마 장수 하시는 것이다.

언니는 엄마가 우리 아버지 만나 재혼 하시기 전에 첫남편에게 나은 딸이다.

언니가 둘이었으나 작은언니는 29의 나이에 아들 둘을 남기고 먼저 갔다.

54의 나이에 쉼없이 일을 한다.

부모복 없는 년은 남편복도 없다고 넋두리 하면서, 하지만 아직도 셋방을 못 면하고 있다.

젊어서 형부는 노름에 바람에 지지리 속석이더니

이제는 술로 애먹이는거 말고는 괜찮다고 언니가 변명한다.

나이드신 외숙모가 차려 주신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외삼촌이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자꾸 권한다.

칠순의 외삼촌 50의 조카딸 40의 조카딸 마주보고 앉아 지나간 얘기에 시간 가는줄도 

모른다.

돌아가신 엄마, 이모, 외할머니, 외숙모 시집살이...........

울다가 웃다가 아픈 기억뿐이니 무슨 말을 한들 눈물 안 흘릴수 있을까?

고생하신 얘기, 힘든 기억들,떨어진 고무신, 먼저 간 작은언니..

홧병으로 가신 엄마,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이모 얘기

칠순의 외삼촌은 기억력이 좋으셔셔 다가오는 3월 1일이 서울 상경 50년이라신다.

"외삼촌 우리 파티해요"

했더니 "그래, 하자. 다들 그때 온나"

하신다.

술이 과하신 외삼촌은 주무신다고 아들방으로 가시더니 못잊어

계속 들락거리신다. 무슨 얘기 하냐고 하시면서.......

1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언니랑 나란히 누웠다.

"언니 내가 언니 만난게 초등학교 2학년때니 30년 넘었네. 언니 기억나나?"

"그래"

"근데 언니 만나면 꼭 물어 보고 싶은게 있었어. 형부가 그리 속섞이는데 왜 살았어?"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꼭 물어 보고 싶었다.

"야, 내가 엄마 떠나고 그래 살았는데 우리 애들을 나하고 똑같이 만들수 없잖아."

정답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더이상 무슨 답이 있을까?

그렇게 눈물과 아픔으로 서울 상경 첫날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