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황희정승이 그랬다지요?
소 두마리를 끌고 밭을 갈고 있을때 지나가던 이가 물었답니다.
'저 검은소와 누렁소 중에서 어느소가 더 일을 잘합니까?"
황희정승은 행여 누가 들을세라 지나던 이를 멀찌감치 데리고 갔습니다.
의아해하는 나그네에게
조그만 소리로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일은 누렁소가 더 잘한다오..허지만..검은소가 이소릴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소?"
아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본듯한 이글이 저는 참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어쩌면 모든 사물에 무생물조차도
주인이 그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낌이 다 있을것입니다.
저의 주방에는 새집에 이사올때 친구가 사준 노란 삐삐 주전자가 하나 있습니다.
워낙 건망증이 심해서 그동안 여러개의 주전자를 없앴습니다.
살때는 예쁘다고 좋다고 사놓고는 찻물 두어잔거리 올려놓고 깜빡잊어버려서
유리주전자...코팅주전자...수도꼭지에 딱 붙이쳐서 깨뜨리기도하고...
한번은 유리주전자 프라스틱 뚜껑이 녹아내려..그것이 주전자안에서 물감처럼 지글지글
끓고있을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여러개 없애는걸 본 친구가 삐삐소리나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사주면서 이제는 깨스불에 올려놓고도 소리나니까 태우지 말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얼마나 고맙고 이쁘던지..
저는 친구를 생각하며 그 노란 삐삐주전자를 정말 정성스레 잘썼습니다.
마치 이쁜새댁처럼 씽크대 한쪽을 늘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려 8년을 ...어디 한군데 긁힌데도 없이 더러워지기전에 얼른 고운 쑤세미로 닦아서...반짝반짝...
삐삐소리 덕분에 태우지도 않고
엊그제 사온것처럼 늘 새것처럼 잘썼습니다..
그러다 얼마전부터 부쩍 무선전기주전자가 눈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물을넣고 찻잔 준비하는사이면 벌써..쏴아하고 물이 끓는 무선주전자가
무척 좋아보였습니다.
나두 저걸하나 사야겠다...
딴 사람에게도 "얘! 요새는 그 무선 주전자 좋더라...물이 참 빨리 끓던데.."
늘 그소리를 해댔습니다.
그러던중 어제밤 이었습니다.
불도 켜지않고 주방에서 의례 주전자에는 물이 있거니하고 깨스불을 켜놓고
돌아서서 뭘좀하다가 한 오분쯤 됐나...
어째 물끓는 소리가 않나나 싶어서 주전자를 들어보니...
아뿔사!
주전자는 물 한방울없이 빈채로 밑둥부터 새카만채로 아무소리도 지르지못하고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개수대에 첨벙 집어넣으니 그제서야...치지직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도 모르게...미안해 미안해...소리가 나왔습니다.
얼룩얼룩 탄자국을 아무리 딱아봤자...그예쁜 노란색은 허옇게 변색이 되어버렸고
바닥은 시커멓게 타버렸습니다.
친구에게도 주전자에게도 그렇게 미안할수가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조금도 변하지않고 노랗게 이쁜색으로
주방에서 언제나 내찻물을 끓여주기에
아무 불편이 없었던 멀쩡한 너를 두고 내가 한눈을 팔며 너를 섭섭하게 했구나..
사물에게도 손때가 묻고 정이 드는법인데...
그동안 내게 늘 물을 끓여주며 명랑하게 삐삐를 부르던 노오란 주전자.
어느새부턴가 다른데로 옮겨간 주인의 관심에
지금 갑자기 낡아서 깨스대위에 있는 노란 주전자를 보면
쓰잘대기없는 나의 욕심이 한 사물에 대해 소홀이함으로써
받은 상처를 보면서...
문득 내주위의 사물뿐만 아니라 정든 친구들 가족들에게도
이런 어리석음을 부리지나 않았나...
자꾸 누구에겐지 죄송하고 부끄러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