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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사러 가는 길 -------


BY 카이 2003-09-18


자신의 그림을 갉아먹는 쥐를 잡았다가 그만 다시 놓아줘버렸다는 화가가 내게 읽으라고 권해준 책이 있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주 특별한 즐거움>.  몇년 전에 사두었다가 얼마전 다시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자신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인공호흡법으로 "모닝 페이지 쓰기"와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두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모닝 페이지 쓰기"는 매일 아침마다 3쪽씩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무조건 써보는 것. "아티스트 데이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만의 일을 하는 것.

-당신의 창조성이라는 어린아이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신을 기르는 기본이다. 그 어린아이는 오랫동안 시골길 걷기, 일출이나 일몰을 보기 위해 혼자 해변에 가기, 찬송가를 듣기 위해 낯선 교회에 가기, 이국적인 풍물을 보러 여행하기를 즐길 것이다. 볼링이나 농구를 좋아할 수도 있다 -

첫 번째 방법은 몇 년 전 시도하다가 게을러서 그만 두었다. ^^  두 번째 방법 역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매주하라 하였으나 남편이 결근을 하고 집에 있어야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시화서점까지 모자를 쓰고 걸어가 시집을 사오곤 한다. 왕복하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린다. 오늘은 외출을 너무도 좋아하고 집안에 내가 없으면 동네 사람 시끄러울까 걱정될 정도로 끼깅거리는 애견 뿌뿌와 함께 집을 나섰다.

꼬마들이 강아지가 귀엽다며 만져보고 싶어 다가오기도 한다. 멍멍이, 멍멍이, 옹알거리는 아가의 소리도 뒤돌아보게 한다. 상점 앞에 매여있던 개가 강아지 뿌뿌에게 으르렁거리는 모습도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이 녀석이 잘 따라오고 있나 돌아도 보고 아무 곳이나 문이 열려있으면 불쑥 들어가는 통에 목청을 돋구기도 한다. 건널목이 나타나면 다시 품에 안아야 한다. 개목걸이를 사야겠다. 나 자신과의 데이트가 꽤나 야단스러워진 느낌이 든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골목을 들여다 보니 또 어느 유흥업소가 개업을 했나. 토플리스라고 하던가. 상체에 비키니만 걸친 도우미들이 요란한 몸짓으로 행인을 유혹한다.
포장마차가 영업을 개시할 시간인가. 노상에 천막과 간이식탁을 설치하느라 분주한 중년 사내의 구부정한 등짝도 내 시야 속에 끼어들고 건널목 맞은 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검은 피부와 왜소한 체구도 눈길을 잠시 잡는다.

둘쑥날쑥한 간판들. 비쭉비쭉 튀어나온 보도블록.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차들. 노점상의 시들어가는 채소들. 노란 참외. 담벼락에 꽃도 잃고 가시만 남은 줄기들.

나는 멍하다. 모두 다 나와는 상관 없는 어느 나라의 풍경 같다.

이윽고 서점에 도착한 나. 오늘 역시 이정록의 시집도 없고 복효근의 시집도 없다. 고르고 고르다가 이생진의 시집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 뒷표지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었다.

<며칠을 살자고 울다가 떠난 매미처럼 벗어놓은 껍질이 이 시집이다. 그 껍질을 들고 매미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도 이 시집에 포함된 한 편의 시다>.

내 안의 아주 먼 곳, 어쩌면 수만억 층 문으로 둘러싸인 깊은 곳에 있는 나만의 시집. 돈을 주고는 살 수 없고 눈물과 고통을 지불해야만 살 수 있는 나만의 시집. 그 시집을 사러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에 어느 나라의 풍경 같다는 말은 없다. 어쩌면 한 겹 문을 열기 위해서 더 많이 울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도 더 많이 울어야 하는 것이다. 며칠을 살자고. 내 안의 시집 한 권 며칠 동안 읽어보자고.

이 횡설수설은 저의 모닝 페이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