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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대소동 -----


BY 카이 2003-09-07

나는 TV에서 오락(entertainment)과 정보(information)를 동시에 제공하는 엔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즐기는 것은 일요일 오후 5시에 방영되는 "콜럼버스 대발견". 지지난 주쯤 되었을 게다. 발뒷꿈치로 남편의 등허리를 장난 삼아 두들기면서 콜럼버스 대발견을 보고 있었다.

그 때 긴 머리를 마치 미용사가 깎은 듯이 혼자서 깎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보여줬다. 남편은 "저건, 나도 알고 있는데. 옛날에 이미 방송했던 거야." 했고, 나는 "그러게 말이야. 요즘 콜럼버스 대발견이 점점 허접해져어~~ 나도 한번 해봐?"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다음날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나는 정말 한번 해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인간 안마기"라는 제목으로 손이나 안마기가 아닌 발뒷꿈치로 남편의 등을 두들기는 아이디어를 제보했던 것이다. 설마 뽑힐까 싶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보름만에 전화가 왔다. 제보가 채택되었다고 촬영하러 우리집에 오겠단다. 설마가 사람을 잡은 거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 당일인 어제 대본을 받아든 나는 큰 사고를 쳤음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시범을 보여주는 장면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씬(seen)이 무려 여섯개로 나뉘어져 있었고 방송국 카메라 앞에 처음 서본 나에게는 두려울 정도로 대사가 많았다.

오후 여섯 시에 촬영팀이 도착한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열두 시에 퇴근하여 목욕탕에 간다고 법석을 떨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청소를 제대로 안해놨다고 지청구가 심하여 나는 속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안방은 시어머니가 쓰시고 우리는 작은 거실을 침실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거실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인데 대본에는 거실이 있다. 안마기와 스탠드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안마기는 없고 스탠드는 내가 얼마전에 깨뜨렸다. 남편은 자기가 술주정하다가 깬 줄 알고 있다. 아무튼 허름한 벽지며 장판 그리고 살림살이.  청소를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게 내 탓인가.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불편한 심기를 누르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어머니는 근처에 사는 친구분에게서 안마기를 빌려왔고 아랫집 새댁에게서 스탠드를 빌려오셨다. 얼마전 방송국에서 받은 침대보를 새로 깔고 남편이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화장실 바닥을 청소함으로써 대충 준비를 끝낸 것이 오후 5시경.

6시에 전화가 왔다. 앞 팀의 촬영이 늦게 끝나 8시에 도착하겠단다. 그러더니 8시에 또 전화가 왔다. 10시에 가도 되겠냐는 것이다. 10시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때마침 우리 아파트로 진입하는 방송국 차량을 발견하였다. 허걱~ 가슴이 왠지 덜컥 내려앉아 아는 채도 못하고 숨어들 듯 집으로 들어와 그들을 기다렸다.

일행은 모두 4명. 들어오자 마자 조명기구를 설치하고 법석이다. 장면은 하나하나 토막 촬영하여 이어붙이는 모양이었다. TV에서 일반인이 대사를 책읽 듯 말하는 것을 보며 비웃었는데 나도 꼼짝 없이 그꼴이 되고 말았다. 떨리지는 않았지만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NG를 연발하며 힘 겹게 토막토막 촬영하다 보니 2시간만인 12시에 촬영이 끝났다.

콜럼버스 대소동이 끝나자 남편은 술 한 병을 비우고 잠들었다. 우리 친정 부모님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렇게나마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그런데 나는 정말 티비 속 모습처럼 언제나 행복한가. 가끔 그런 모습으로 행복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많다. 나는 정말 "연기"를 해본 것이다!

"인간 안마기"라는 딱딱한 나의 제목과 닭살 부부의 "사랑이 꽃피는 안마"라는 작가의 제목. 그 사이에 뭔지 모를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작가가 붙여준 그 제목에 감사하면서 사랑을 꽃피우려고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