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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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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BY 고갯길 2003-08-25

아까부터 정은이는 자꾸만 발끝으로 땅을 팔 모양으로 후비고 있었다.

어찌해 볼 의양인지 모르겠는지 준환도 그녀를 바라다 보다 같이 땅에 그림만 그렸다.

덕수궁에 한 켠에 있는 벤치에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러기를 한참을 했다.

그러다 문득

'에이, 그러면 우리 그만 두자'

준환이 잔뜩 볼멘 소리로 내 뱉듯 소리쳤다.

'그런 사람들 말에 흔들려서 시작할 결혼이라면 이 참에 그만 두는것 낫다'하며 그가

일어서서 몇걸음 내딛으며  그녀를 돌아보자 그는 눈물이 가득 고여 원망어린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바보, 누구는 그런 소리 할 줄 모르나,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하고 준환이가 다그치자

'자기랑 정이 들어서, 그냥은, 헤어질 수 가 없거든, 그래서...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이참에 헤어지자 소리가 그렇듯 금방

나오냐?' 정은이는  서러움에 흐느끼며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그냥 땅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 말을 들은 준환이는 긴 한숨을 내 쉬더니 두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다정히 말한다.

'그러면 우리 결혼하자, 누가 뭐래도 우리만 변치 않으면 무슨 난관이든 이길수 있어'

'우리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살자, 내가 도와 주께. 걱정하집마'

 

 

이 삼류대사 같고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나의 고생의 서곡이

되리라고 그때는 미처, 오로지 나만이 몰랐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분했다.

 

'여보, 이 와이셔츠말고 다른 것 없어? 흰색 반팔은 어디간거야, 에이 참'

아침준비에 정신없는 마누라한테 눈만 한번 휘두르며 보이는 곳에 걸려 있는 옷조차

찾아서 입혀 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 여전한 남편의 버릇은 어쩌면 내가 그렇게 만든  원인제공자다. 수 없이 출장을 다니는 남편이 안스러워서 일일이 옷을 챙겨주고 입혀주었더니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예 나만 있으면 뭐든지 못찾는 눈뜬 장님인 체 한다. 사랑이 배를 채워 주던 신혼 때는 쪽쪽거리며 털어주며 행복해 했었는데, 요즘은  '으이그, 옷도 못찾아 입어, 징해라 징혀'하고 투덜대고 뛰어간다.

다혈질인 그의 성격을 아는 정은이는 그의 눈썹만 치켜뜨는 모양도 보기 무서워서

부엌에서 무엇을 하던 중이던 상관없이 그의 일이라면 심지어 리모콘이 어디있냐고

소리를 질러도 콩콩 거리며 찾아다 주는데 그때하는 그의 말이 일품이다.

'이런건 잘 보이는곳에 한꺼번에 두지, 여기저기 두냐..'

 

그러던 어느날 정은이가 몸에 드디어 고장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집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시어른은 동서집으로 쫓겨가듯 옮겨가시고 애들은

엄마가 신신당부한  대로 일감을 서로 나누어서 한답시고 하지만 티격태격 다툼이

끝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무엇하나 정상인것이 없는 것 같은 집 구석에다

더군다나 자동 리모콘 역할을 하던 정은이가 없으니 속도 상하고 배도 고팠겠지

냉장고를 뒤져서 이리저리 먹을 것을 준비해서 밥을 해먹던 세 남자는

며칠이 지나자 엄마의 자리의 공간과 냄새가 순간 그리워 졌나 보다.

다음날 마침 휴일에 그들은 정은이가 평소에 국수걸이 었다는것을 기억해 내고

멸치 장국과 국수를 삶아서 마우병에 담아다 그녀의 입원실로 몰려가더니,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 해왔으니 먹어보라고 아우성을 댔다.

그들은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하며 엄마가 없어도 집안일은 걱정말라며 서로가

한일을 수선스럽다싶게 늘어놓더니 갑자기 막내놈이

정은의목을 와락 끌어안고 쿨쿨거린다 싶더니 큰놈도 엎어져서 훌쩍거렸다.

그 모습에 남편은 창밖만 우두커니 바라다 보다가, 아무말 없이 국수 그릇을 스윽 내밀었다.

지금도 그 국수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맛있었냐고? ㅎㅎ

아마 소금이나 간장을 넣는 것을 잊었던 가봐.

 

더욱 이상한게 그후에도 국수를 먹을 때 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특히 친구들 모임일때나 외식을 할때는  그 퉁퉁 불은 국수발에다 밍밍했던 그 맛이

내 식구들의 사랑맛인것만 같아서 외출시간을 빨리 단축 시키고

식구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하는 정은이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소외되서 사랑도 식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말없는 식구들의 모습을 통해 진한 사랑을 느끼며 우리의 약속의 기한은 없었구나 하고 그간의 속좁았던 생각에 툴툴거렸던 내가

어리석었던 같아 후회만 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