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길래 내가 어제 밤에 그렇게 깨웠잖아..
약속한 일이면 시간맞춰 해줘야지.
벌써 하루를 넘긴 거 아니야!"
(제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만 좀 해. 그 얘기 다시 해서 뭐해!"
"아이한테 저녁에 아빠가 데리러 갈거라고 얘기했단 말야!"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안데리러 가고 싶어서 그러냐!!"
어제의 일입니다.
어제는 모처럼 일찍 남편이 퇴근하는 날이라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얘기합니다.
"저녁엔 아빠가 데리러 올거야"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린 아빠를 생각하며
아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아주 환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런데 퇴근시간 무렵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까지 해주었어야할 일을 못해서
아예 회사에서 하고 오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집에 오면 아이 등쌀에 아이가 잠들기 전까진
컴퓨터 앞에 앉을 수조차 없으니까요.
그 전날 밤에 작업을 해야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모처럼 친구와 저녁을 먹고 느즈막히 들어와보니
남편은 아이와 함께 자고있었습니다.
"할 일 있다며, 안 일어나?"
"(짜증밴 목소리로)일어날거야. 들어가서 자"
몇 번을 다시 깨워보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두고
방에 들어갔습니다.
30분 간격으로 울리게 조정해놓은 전화기 알람이
여러 번 울리더군요.
그리고 아침엔 일찍 출근해버려
일을 다했는 지 확인할 수 없었죠.
결국 아이는 제가 데려왔습니다.
아빠가 오지 않은 것에 실망했는 지,
반가워하던 제 고등학교 친구와 친구아들이 함께 왔는데도
세살배기 제 아이는 그다지 신나하지 않더군요.
결국 일을 하고 9시 반에 집에 들어온 남편.
가뜩이나 기분이 나쁜데 밥 안먹었다며
"밥 좀 차려줘" 합니다.
"이게 뭐야. 왜 맨날 그러냐구~"
"그럼 지금 와서 내가 밥 차려 먹어야겠냐?.. 투덜투덜"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이 친구까지 와있는 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더군요.
살짝 방으로 따라들어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합니다.
"제발 누구 있는데서 퉁퉁 거리지 좀 마! 챙피해죽겠어"
"(거칠게 옷을 벗으며) 알았다. 알았어..
(기분나쁘게) 그 명령 지금부터 따르면 되냐?"
세수를 하고 나온 남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을 푸고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저는 국을 뜹니다.
남편은 한 술 더떠 제 친구의 비위까지 맞춥니다.
"(친구아이를 보며) 17개월 된 녀석이 벌써 말을 저렇게 해?
저런 녀석 처음 보겠네.."
그렇다고 이상기류가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잠깐 남편과 함께 얘기를 하다 친구가 돌아갔습니다.
저 혼자 생각했습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내가 남편처럼 당당하게
'밥 차려줘'를 외칠 수 있었을까?
저도 종종 일을 하다가 밥때를 놓치고
늦게 집에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특별히 몸이 아프거나 하지 않은 한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미안해해야할 상황에서
오히려 화를 내고 있으니.
그것도 친구까지 와있는 데서 날 바보로 만들고 싶은 것인지.
여러 가지로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평소에 '훌륭한 남편'으로 회자되는 자신의 이미지조차
관리하지 못하면서 말이죠.
'그럴려고 한 게 아닌데 자기가 못 일어나는 바람에
여러 가지가 꼬였다고..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했다면
저도 기쁘게 밥을 차려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앞서 남편의 권위를 찾고 싶었을까요?
과연 남편의 권위가 '밥 차려줘!'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닿는대로 남편과 그 날의 일을 다시
얘기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불리한 상황을 위압적인 모습으로 얼버무리려는
우리 아버지 세대와 너무 닮아있는 남편의 모습을
우리 아이가 주의깊게 보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