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동네였다.
팔 십 여 호가 넘는 동네였지만 기와집 한 채 없었고 연탄을 때는 집 하나 없었다.
저녁 지을 때가 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다.
초가 지붕위로 피어 오른 연기가 마을을 감싸는 모습이 평화롭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에 스미면 뛰어 놀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 것을 알았다.
수다스런 아낙도 한 집, 두 집, 굴뚝에 연기가 오르면 그만 수다를 멈추고 돌아가 저녁 준비를 해야 될 때인 것을 알았다.
연기가 온 마을을 감싸고 잠시 후면, 미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남정네들은 겨울이면 일 년 내내 쓸 나무를 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땔감은 그 종류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비나무, 갈퀴나무, 풋나무, 삭정이, 청솔가지, 가시나무….
비나무는 키가 큰 마른 풀들을 낫으로 베어서 땔감으로 사용할 때 일컫는 이름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베다’를 ‘비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싶다.
갈퀴나무는 가랑잎을 갈퀴로 긁어 모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풋나무는 미처 마르기 전 키가 큰 풀들을 베어 말려서 땔감으로 쓰는 경우다.
삭정이는 죽어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은 것이고 청솔가지는 땔감이 없을 때 사용하는 푸른 소나무 가지를 일컫는 이름이다.
아카시아나무나 그 밖의 가시가 달린 나무들은 다루기가 힘들어 좀체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땔감을 구하기가 힘들면 그 것들도 땔감이 되었다.
“막내 딸아, 나무하러 가자.”
“싫어요.”
“아버지 심심한데 같이 가자아~!”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못 이긴 척하고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아버지 동무를 하기 위해 따라간 것이다.
“옛날에 옛날에 어떤 나뭇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더란다.
나무가 없어서 자꾸 가다 보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드디어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지 뭐냐.
……”
가는 길에 아버지는 옛날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였다.
길 가에 있는 풀 이름, 나무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주로 한 것은 갈퀴나무였다.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면서 가랑잎이 많이 쌓인 곳을 찾았다.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싶으면 근처의 덤불을 낫으로 쳐서 갈퀴로 긁기 좋게 정리를 하였다.
그런 다음 갈퀴로 긁어 모은 가랑잎을 준비해 간 새끼 줄이나 칡넝쿨을 이용해 묶어 나뭇단을 만들곤 하였다.
울 아버지 나뭇짐은 동네에서 가장 크다고 소문이 났다.
혼자서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지 못했다.
비탈진 곳에 지게를 세우고 날 더러 뒤에서 밀어달라 하였다.
그 전에 나무를 조금 남겨 내가 이고 갈 수 있도록 한 단을 만들어 둔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 지게를 밀어주고 나 혼자서도 머리에 일 수 있도록 적당히 조그맣게…
그러나 너무 가볍게 해 주었다간 막내 딸을 우습게 본다고 불평을 들을 수도 있으므로 적당히 무겁고 크게…
아마도 아버지는 그 크기를 정하는 일에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그 무게가 혼자서 이기에 너무 버겁지도 않았고, 너무 가벼워 날 실망시키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그렇게 겨울 방학은 심심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아버지하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산 골짝, 골짝, 안 가 본 곳이 없을 만큼 쫓아 다녔다.
나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던 것 같다.
“나무보고 물어봐라.”
아버지가 가끔 이렇게 대답하곤 했던 것을 보면…
그래도 아버지는 귀찮지 않았던 지 다음 날이면, 안 가겠다는 날 꼬드겼다.
“아버지 심심한데 같이 가자아~”
울 아버지 무덤 속에서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그 때 날 데리고 나무하러 다닌 것을 내가 얼마나 감사히 여기며 사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