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한가한 틈을타서 며칠전 수몰된 고향에 다녀왔다.
고향이랬자 어릴때 내가 살던곳과는 많이 달라진 새로운 동네였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은 왜 늘 갈증이 나는지....
가물때면 물속에 있던 우리옛 집터가 드러나는데
꼭 한번 한가하게 그곳을 더듬어 가고싶다.
꼭 20년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그땅을 한번만 밟아보고 싶다.
그런데 고향가는 길은 왜 늘 사는일처럼 바쁘고 정신없는지....
가는시간 보고 오는시간 재고 나면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라도 만날 시간이 없다.
친정 엄마와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고향하늘과 푸른강물 그리고 녹음은 나를 또 설레게 만들었다.
먼저 아버지 산소에 도착해 준비한 예취기로 대충 정신없이 자란 풀들을 잠재우고 잡풀을 뽑고 엄마가 준비하신 술한잔 부어드리고 그리고 친정고모가 사시는 동네로 향했다.
자식과 떨어져 홀로 사시는 고모님 모시고 나가 점심 먹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더디 끝나 늦게 도착하니 고모님이 벌써 점심을 지어놓으셨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이천쌀보다 더 맛있는 충청도쌀로 지은 밥을 먹고 소식듣고 찾아오신 고향분들이랑 엄마는 정담을 나누는 사이 고모님과 나는 작업에 들어갔다.
무슨 작업인고 하니 봄내 뜯어 삶아 말린 봄나물을 조카와 올케를 위해 봉지봉지 담아놓으신것을 시골에 산다고 염두에 안둔 둘재조카가 왔으니 다시 한봉지 늘리는 작업을 하신것이다.
그리도 총명하고 알뜰하신 고모님이 이젠 80이 가까우시니 방금 손댄 봉지도 다시 풀렀다가 다시 싸고 이놈 만졌다다 다시 싸고 저놈 만졌다가 처음것 만지고....
하도 우스워 깔깔깔 웃었지만 서글픈 마음이 가슴을 싸하게......
이제 저 정신마저 놓으시면 정말 우리고모 어찌되는걸까?
자식이 있다하나 없으신것만 못하시니 주제넘게 조카라고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마마는 당신은 깨지고 호미에 이겨져서 흙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늘을 잡수시면서 콩말만한 마늘 성한것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올케며 조카 싸주시느라 꼬부라진 허리로 이구석저구석 분주하시다.
이웃에서 드시라고 넣어준 오이지며 장아찌마저 그것조차도 도시산다는 올케를 위해 싸주시려 동동거리시고....
어릴때부터 오래 같이 살아서인지 엄마같기도 하고 할머니같기도 하고 급하면 엄마라고도 부르고 할머니라고도 부르고 했던 우리 큰고모
큰고모의 잊혀질 지난날을 한번 기록해보고싶다.
울 고모는 4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문턱을 못가보고 17~18세경에 결혼을 하고 남매를 두었는데, 21살쯤이던가 전쟁중에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딸은 홍역으로 잃고 겨우 아들하나만 건져 그야말로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옆에 방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내가 고모를 알게 된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바로일 것이다.
내가 태어날 즈음 오빠는 고등학생쯤 되었을테지만 별로 기억에 없다.
아마도 도회지로 나가 자취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어려운 시절에 여자혼자 친정옆에 더부살이를 하며 아들 하나를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면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하셨는지 알만할 것이다.
그런 아들은 너무나 착해서 엄마말을 한번도 거스린적이 없다는데, 착한것이 또 불효가 될줄이야.
알뜰살뜰 법없이 살 고모님과 어느것하나 맞지 않는 신새대 며느리와의 생활은 결코 순탄친 않았고 어머니에게 착했던 아들은 아내에게 또한번 착한 남편이 되어 순하디 순한 고모님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고 이제 손주며느리 보실 연세가 되셨는데 한많은 생을 어찌 갚아보시겠다고 독립을 선언하고 나오신 것이다.
그 과정 또한 순리대로 이쁜 모양새는 갖추지 못했을것이 뻔한것
가슴에 상처만 스스로 후벼파고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며느리에게 또한 같은 상처 만드시고 이젠 정말 하나님 아니면 메우지 못할것 같은 깊은 골을 남긴채............
그렇게 살아오신지 3년이 지나셨을까?
태풍 몰아친것처럼 우리들이 쓸고간 자리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올 때 멀리멀리 손흔드시던 고모얼굴이 쓸쓸하고 외로운 고모얼굴이 자꾸 마음을 아리게 한다.
어찌 올케 언니에게 나쁜사람이라고 나는 말할수 있을까?
나도 남의집 며느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올케언니같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가끔씩 나의 시어머니와 고모의 닮은점을 생각해본다.
두분다 며느리를 질리게 할만큼 못말릴 고집을 가지고 계신데 알고보니 두분다 경주최씨
두분다 궁상맞으리만치 알뜰하신데 그것이 며느리 세대를 바라보시는 눈이 되었을땐 얼마나 가혹할런지....
두분다 어려운 시절을 껶어내셔서 가슴에 찌그러진 멍을 안고 계신데 은연중 자식들에게 아니 며느리에게 보상받고 싶은 심리는 얼마나 며느리에게 진저리치는 부담일런지.....
그래 난 고모를 시어머니로 만나고 시어머니를 고모로 만난다면 똑같은 상황일꺼야.
지금은 진저리치게 밉고 싫은 시어머니도 고모가 되어 계신다면 안타깝고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으로 가득찰터이고
지금은 안타깝고 연민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는 고모도 시어머니 자리에 있으면 목소리도 듣기 싫을만큼 싫은 상태가 되어 있을런지도 모르지...
문제는 자리였다.
우리가 고부로 만나느냐 이웃으로 만나느냐 친척으로 만나느냐 상황에 따라 악연이 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을것이란 생각을 했다.
오늘도 난 시어머니를 고모로 보기위해 애써 눈을 바꾸고 있는중이다.
문제는 어머니가 날 조카로 볼려고 노력을 안하실것이란 생각이 김빠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