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가까이를 백화점에서 근무하면서 사람에 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성격도 각양각색이고 게중에 정말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람이 싫어질정도로 양심 없고 막되먹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다행히 나쁜 사람보단 좋았던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다.
몇년전이였다. 한창 IMF로 온나라가 술렁거리고 있을때 백화점도 침체된 경기때문에 매출이 오르지 않아 힘들때였다. 약간 고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이였던지라 특히 우리 매장의 매출은 지난해보다 뚝 떨어져서 매출 압박이 이만저만 심한것이 아니여서 가끔은 그 스트레스로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유난히 떨어지는 매출에 이젠 내 능력까지 운운해가며 쪼아대는 백화점 관계자때문에 그만드고 싶을만큼 힘든 그때 한 남자 손님이 한번 둘러보기만 하겠다며 매장으로 들어왔다.
적당한 키에 다부진 체격이 겉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여유있어 보이는 사람이였는데 이것저것 상품을 보고 설명을 하던중에 맘에 드는 상품을 찾았는지 그걸 들어보이며 사이즈를 달라고했다. 손님이 들어보인 상품은 가장 인기상품이였는데 하필이면 손님이 찾는 사이즈가 이미 품절되고 없는 상태였다. 난 죄송하다며 이미 사이즈가 품절된 상품이라고 했지만 손님은 그 상품이 아주 맘에 든다며 꼭 구해달란 것이였다.
매장에서 손님과 무리하게 약속을 했다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경우 징계를 받기때문에 무척 고민스런 상황이였다. 그러나 너무나 맘에 들어하시는 손님을 외면할 수도 없고 특히나 매출이 부진한 상황이였기에 난 구해드리겠다고 결국 약속을 하게 되었고 손님은 상품이 도착하면 계산을 하겠다며 약속증만 받아가지고 돌아가셨다.
손님이 돌아가시고 난후부터 그야말로 전쟁이였다. 이미 전산상으로는 품절이 된 상태였지만 간혹 인기상품은 비밀스럽게 매장마다 숨겨놓을 수도 있기때문에 전국에 있는 매장마다 일일히 전화를 해서 갖은 아양과 협박(?)을 해가며 상품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이틀에 걸려 열심히 알아본 노력이 가상했는지 마침 그 귀한 물건을 반품받은곳이 있어 진짜진짜 어렵게 그 상품을 구해놓을 수가 있었다.
난 너무나 기뻐 손님에게 전활 드렸다. 손님은 조만간 매장에 나가서 상품을 계산할테니 잘 보관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약속과 다르게 그후로도 여러번 전활 드렸지만 절대 팔지 말란 말만 하실뿐 계산하러 오시진 않았다. 어느새 겨울도 지나가고 있었고 이대로 있다가는 없어서 못파는 상품이 재고가 될 판국이였다. 또 만약 없어서 못팔던 인기상품이 재고처리 과정에서 나오게되면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싫은 소릴 들어야했다. 매출보다 더 중요한것이 어찌보면 상품의 원활한 유통으로 재고를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 너무나 화가났다.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갖고 있기도 그랬다. 손님은 이젠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토록이나 열심히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애썻건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져버리다니...
그렇게 시간이 갔고 한달이 지났을쯤이였다. 무심코 우리 매장앞을 그냥 지나쳐가는 손님을 본것이다. 그냥 가게 둘수도 있었겠지만 난 손님의 확답을 받아야만했다. 저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상품을 사실것인지 마실것인지.
손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나오시네요.
최대한 쾌할하게 인사하는 내게 손님은 어떻게 자길 기억하냐며 기분 좋아했다. 난 손님을 매장안으로 모셨고 한달전에 주문하신 상품에 대해 말했다. 어렵게 상품을 구한 애기와 아직까지 판매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구입하실 의향이 있는지...
그렇게 손님앞에 상품을 내어보이자 갑자기 손님이 고개를 약간 떨구시더니 씁쓰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여나 내가 강매를 하는거라 생각해서 화가 난건가 했는데 잠시뒤 고갤 드신 손님이 활짝 웃으시더니 말했다.
아가씨! 정말 고마워요. 실은 내가 얼마전에 사기를 당했어요. 가장 믿었던 사람한테. 정말 사람이 싫어지더군요. 세상 믿을 사람 없다고 무척 실망하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한달도 전에 내가 주문한 상품을 언젠가 꼭 내가 살꺼란 믿음으로 지금껏 보관하고 있었다니 세상에 아가씨같이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렇게 손님은 기분좋게 이미 철이 지나 돌아올 겨울에나 입을 그 옷을 사가셨고 손님의 분에 넘치는 칭찬에 한동안 오지 않는 손님을 원망하며 나 역시 사람에 대해 실망했던 그 옹졸함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삶이 지치고 사람에게 실망할때 그때 그일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 당장 돈을 갚지 않고 연락이 두절된 친구도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여 그랬을꺼라 생각하게 되고 남편의 서운한 말한마디에 화가났다가도 속마음이 저렇진 않았을꺼란 생각에 어느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내게 너그운 마음을 깨닫게 해주신 그때 그 손님을 떠올리며 한때의 옹졸함으로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고 원망했던 나자신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