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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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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BY 칵테일 2001-01-08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시절, 무슨 포카를 아셨을까싶지만,
공교롭게도 우리집의 장판은 포카에 나오는 킹과 퀸의
그림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연노랑 병아리색이었지만, 카드 모양이
규칙적으로 그려져있었지요.

어릴 때는 그게 무슨 그림인지도 모르고 봤습니다.

카드 그림에 나오는 수염이 긴 킹의 모습과 여자라기
보다는 마법사같은 느낌을 주는 퀸의 모습.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몇번 아버지께 물어본 적이
있긴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냥 얼버무리듯 넘어가셔서 정말 그게
서양 카드놀이에 나오는 그림인 줄 몰랐습니다.

그 장판이 깔린 방은 상당히 넓은 방이었는데, (안방이었
습니다.) 어린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킹과 퀸의
숫자를 세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규칙적으로 사방무늬처럼 배열되어 있는 그 그림들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4가지나 되어있었을 뿐더러 웬지
모르게 미로에 빠진 것처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히려 알쏭달쏭한 느낌을 주거든요.

지금은 보일러를 쓰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지나치게
난방이 되어 장판이 타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땐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집 장판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어느 한 부분 새카맣게 타버리기도 했는데, 타버린 곳은
장판의 그림이 엉망이 되어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심하게 탄 부분을 오려내고 다른
장판으로 살짝 바꿔 까시기도 하셨지만 그래도 그 타버린
자국은 금방 눈에 띄게 마련이었지요.

장판만 그런 요란한 무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잔잔하고 예쁜 꽃무늬 벽지도 많은데, 그때는
왜그렇게도 촌스럽고 유치하기만 한지요.

우리집의 벽지는 그야말로 어디서 맘대로 골라온 듯한
그런 우중충한 색깔에 (마치 흰색이 이미 때가 타서
회색이 되어버린 듯한) 무늬까지 사방무늬로 복잡한데다
심지어는 기하학(?)적인 그림이 들어간 것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취향이었는지, 새어머니의 취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무늬]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가 아마도 그 벽지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아주 외곬수적인 면이 있는 데, 무늬가 들어간
옷이나 물건을 아주 싫어합니다.

되도록이면 단색이고, 설령 무늬가 있더라도 별로 표가
나지 않는 것이어야 하지, 무늬가 대담하게(?) 그려진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안방에 누워 천정을 보면 복잡한 무늬가 이리저리 얽힌
사방무늬벽지에다가, 방바닥을 쳐다보면 마치 카드 패를
깔아놓은 듯했지요.

어릴 때는 안방에 큰 댓자로 누워 천정의 사방무늬도
세고, 방바닥 카드 그림에 나오는 킹과 퀸도 세고.....
그러고 놀았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그 당시로는 꽤 인기있는 라디오
프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 그 라디오를 들으면서 서양 카드
그림을 세고 있는 어린 꼬마 아이를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어릴 때의 내 모습이랍니다.

그러나 정작 나이 사십이 가까워오도록 세븐 포카를
비롯한 서양 카드 게임을 할 줄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작년 말에 우연히 부부동반 모임에서 취미
삼아 하느라 배웠는데......

막상 배우고 보니 참 재미있는 게임일 뿐 아니라, 십수년
만에 다시 그 복잡한 카드 그림들을 대하니 반가운(?)
마음까지 들더군요.

내 아버지 또한 카드 놀이가 뭔지도 모르고 사시다 가신
분이셨지만, 그래도 내 어머니께 한번 서양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아예 장판을 그 모양으로 까신
것을 보면 그래도 뭔가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나나 아버지나 우직한 부분이 있어, 어쩌면 그리운
부분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일생을 내 어머니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셨던
나의 아버지.

내 어머니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셨던 내 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느껴집니다.

인간 사 모든 것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것이면 사람이건 물건이건 알 수 없는 집착이 따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꼭 아버지의 묘소를 가고 싶었는데, 저리 많이도
내리는 눈때문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잘 자리에 누워 천정을 보니 핑그르 눈물 돌아, 어릴 때
질리도록 보고 또 본 그 장판, 그 벽지 떠오릅디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