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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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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시아버님이 보고 싶다


BY dansaem 2001-09-27

아컴엔 들락거려봤지만 이 방에는 어제 첨 왔어요.
배꼽잡는 이야기, 눈물나는 이야기, 내 얘기 같은 글들이
절 틈만 나면 컴 앞에 앉게 하네요.

오는 금요일(28일)은 저희 시아버님의 첫 제사에요,
작년 추석을 앞두고 돌아가셨거든요.
작년에 회갑을 맞으셨으니 연세도 그리 많지 않았지요.

제사를 앞두고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희 아버님 얘길 좀 해볼께요. 들어주실래요?

************************

아버님은 외아들이다.
시조부님은 6.25때 월북을 하셨는지, 어쨌는지
행방불명이시고, 스물아홉엔가 혼자되신 시할머니께서
금이야 옥이야 키우신 하나 뿐인 자식이다.
그 시조모님도 장수하시고 작년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을 두달 앞세우시고.

당시에는 땅도 많고 제법 있는 집안이었다고 하고
또 귀하게 자라셨으니 남들과 어울리기엔 힘든 성격이셨다.
당시로는 (더구나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셨고
한학에도 일가견이 있으셔서 붓글씨도 정말 잘 쓰셨다.

젊은 시절 공무원 생활을 하셨는데 성격상 조직생활에 적응이
잘 안 된 탓에 그만 두고 차라리 농사를 짓겠다 하셨지만
농사일엔 취미도 소질도 없으셨고
문중일이나 동네의 송사 같은 일에는 발벗고 다니셨다.

그러다 보니 느는 건 술 밖에 없으시고
여차 저차 하다보니 술과 너무 친해지신 게 화근이었다.

내가 결혼한 지 올해로 5년차인데
나는 별로 아버님의 술주정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지만 이리저리 주워들은 얘기들-
아무데서나 누워 주무시기도 하고, 욕설과 싸움, 외상술...
안 드실 때는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안드시다가
한번 입에 대면 일주일씩, 열흘씩 술만 드셨다.
물론 식사는 거의 안 하신 채로.

그러다보니 어머님의 고생이 심하셨다.
자식은 줄줄이 7남매를 낳으시고
그나마 있던 전답도 다 줄고
홀시어머니의 외며느리로 환갑이 되도록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 하느라 등이 휠 지경.
게다가 남편이라고 기댈만한 언덕은 커녕
늘 가슴졸이고 저질러놓은 일 뒤치닥거리 해야하는
이중 삼중의 가시밭길.

그래서 아버님은 자식들에게도 별로 대접을 못 받으셨다.
그리고 당신도 아들, 며느리, 손주들에게 별로 정을 안 주셨고.

그런데 유난히도 우리 아이들이랑 나는 이쁘게 봐 주셨다.
손주들 오면 시끄럽다고 역정이나 내시는 분이
우리가 가면 웃으면서 반겨주시곤 했다.
지금도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마당 한 귀퉁이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다가
우리가 가면 돌아보시며
"아이구, 우리 돼지 왔나?"
하며 웃어주시던 모습이. (우리 아들을 항상 돼지라고 부르셨다.)

언젠가는
무슨 이사회든가 어디를 다녀오셨는데 거기서 받은 거라며
무언가를 은밀히 손에 꼭 쥐어주셨다.
"니 구두 사 신어라."시며.
칠만원짜리 상품권이었다.
극구 사양을 했건만 기어이 쥐어주셨다.
다른 식구들 아무도 몰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일 생각나는 일이 있다.
아버님은 시골에 계셨고
그 때 우리는 10분 정도 거리의 읍내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님은 볼 일 있어 나가셨다고 했다.
그냥 무심히 듣고
그 날도 나는 늘 하던대로 아이를 유모차에 앉혀놓고
마당에 빨래를 널었겠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아버님이
지난 번 언제 쯤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너희 집에 갔었노라고.
너는 빨래 널고 있고 돼지는 그 옆에서 놀고 있더라며
그저 모퉁이에서 들여다만 보고 왔노라고.

"아유, 아버님은! 들어오시지 않구요..."

그 때 아버님이 들어오실 수 없었던 이유는 이랬다.
"내가 돈이 없어서 우리 돼지 줄 과자 한봉 못 사갖고 갔다."

그 때 어머님과 아주버님들은 모두 아버님께 거의 용돈을 드리지않았다.
돈만 생기면 술을 드셨기 때문에.
나는 드리고 싶어도 어머님의 원망을 들을까 봐 드리지 못했었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떠오른다.
햇볕 따순 가을 날,
마당에 팔락이는 하얀 기저귀와 그 옆에 놀고 있는 아기,
그리고 마당 모퉁이에서 살짜기 들여다만 보다
돌아서 가시는 아버님의 작은 등.

그 장면에서는 항상 눈물이 핑 돈다.

한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달리 보인다.
한 남자의 쓸쓸한 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