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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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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BY 칵테일 2000-09-28





빙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아주 커다란 전축이 있었다.

요즘처럼 블랙톤이나 실버톤으로 세련되게 생긴 전축이 아니라, 무슨 가구처럼 매끄러운 바탕에 자개가 박혀있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촌스럽고 유치한 전축.

게다가 색깔조차도 빨간색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나는 선명한 느낌의 빨간색에 대해서는 막연한 공포감이 든다-- 아직까지도 내 뇌리에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평상시 음악을 즐겨듣는 분이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우리집 살림중엔 텔레비젼 다음으로 장만한 것이 바로 그 전축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필시 어떤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내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사셨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듣자고 그 전축을 트시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전축을 듣는 사람은 거의 우리 어머니셨으므로.

그러나 내 어머니께서 들으셨던 음악은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였고, 아주 가끔은 이미자씨의 노래-그 간드러지고 애절한 목소리, 너무도 특이하니까 기억하기도 아주 쉽다--가 흘러 나오는 까닭에 어머니께서 듣는 음악이 대충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 전축을 늘 정성들여 닦으셨고, 가끔씩은 레코드자켓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시면서 무언가를 흥얼거리시기도 하셨다.

특히나 좋아하셨던 노래가 있었다면 이미자씨의 '빙점'이란 노래와 '섬마을 선생님'.

어릴 때는 그렇게 자주 들어도 그게 무슨 노래인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 그 음악을 들으실땐 나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그 노래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버렸고, 노래방같은 곳에 가면 꼭 부르게 되는 노래기도 하다.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나와 내 어머니의 공통점이 있다면 외곬수적인 면과 무엇하나를 집중적으로 좋아하고, 또 좋아진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날 보면 늘 그러셨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모든 면에서 네 어머니를 닮아간다고. 함께 한 시간이 짧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많은 점이 닮아가는지 마음아프시다고.

내 어머니를 얻기위해 갖은 설움과 모욕을 다 감수하셨던 아버지.
내 아버지와 함께하기 위해 어머니의 평탄한 인생을 다 포기해야했던 내 어머니.

그들의 필연적인 사랑으로 태어난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씀씀이와 어머니의 불꽃같은 정열을 닮아가려 애쓴다.

빙점. 아마 어머니께서 그 노래를 좋아하셨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릴 때 자라면서 늘 들었던 정서와 흡사한, 아마도 한국노래중에 이미자씨의 노래들이 그랬지않나 싶다.

이미자씨의 노래 창법도 일본 엔가와 유사하기때문에 어쩌면 그의 노래를 특히나 더 좋아하지 않으셨을까.
나역시도 일본가수 다까오를 좋아한다.

생전에 어머니가 바라신게 있다면 아마도 고향을 잃고 살아가는 자신에게 향수를 느끼게 준 그 노래들을 자주 들을 수 있는 것 정도가 아니셨는지.

그러니 그것을 안 우리 아버지께선 당신 취향이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전축을 들여놓으셨을테고.

내 아버지께선 당신 하나 믿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아내에게 그 무엇인들 못해 주었을까.

새삼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삶에 대한 추억에 젖어본다.
빙점.
아주 슬픈 노래지만 어머니의 숨결이 들리는 듯 하여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노래가 될 것이다.

또 아주 가끔은 엄마나 내가 그 노래의 한자락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해본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