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이야기지만..
한때 취미삼아 [역학]을 배운 일이 있습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3개월 단위로 하는 강좌였는데,
그래도 흥미있게 끝까지 다 배운 셈입니다.
역학이란 신내린 무당들이 보는 점과는 다른 것으로,
어찌보면 확률게임같은 것이지요.
그때 내가 역학을 배우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삶이란 것도 어쩌면 결국 제비뽑기같은 게 아닐까하는
거였습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운명]과 [숙명]이 있다고 그래요.
숙명이란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한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숙명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을 말함입니다.
한데, 운명이란 숙명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에요.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바뀔 수도 있는 가변적인
요소를 운명이라고 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만약 자신의 팔자에 자동차가 있게 되는 게 숙명이라고
합시다.
그 자동차를 그랜저로 뽑느냐, 마티즈로 뽑느냐 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인생에 차가 있게 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 사실 자체가 숙명이 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차종을 결정하는 부분은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를 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수적인 것을
운명이다 숙명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흔히 점을 볼때....
점쾌를 말함은 [숙명]적인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숙명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실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점쾌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인 거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어떤 사람이 점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 하는 말이 [말]을 조심하라고 그래요.
몇월몇일 자정까지 절대로 말을 조심하면 네 목숨을
건질 수 있으니 살고 싶으면 그리하라고 이르더래요.
그렇지 않으면 말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점쟁이말이 하도 심상치 않고,
그까짓 며칠쯤이야 어떨까싶어 말을 조심하기 위해
아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문도 걸어잠근채 집밖을
나가지 않고 버텼대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말실수를 할 일도 없고, 자기가
남에게 어떤 말도 들을 일이 없으니 그렇게 한거지요.
그렇게 약속한 그 시간이 다 흘러갔습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조금있으면
약속한 자정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정 무렵에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래요.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여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제
약속한 자정도 다 되었는데 뭐가 어떠냐싶어 벌컥 문을
열었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말]이 집안으로 뛰어들어와 그 사람은
그 말에 치여 즉사하고 말았답니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조심하라고 했던 말은 [구설수]가
아닌 진짜 살아 숨쉬는 동물인 말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일반인이 동물인 말에게 피해를 당할 확률
이란 거의 없는 편이고하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을 조심하라니까 구설수를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말에 의해 변을 당하리란 사실이 숙명
이었다면 그것은 그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행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께 들었었는데,
무척이나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로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데, 과연 이 인생이란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건가싶은 허탈감도 사실
들었었구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많은 삶의 시간은 운명으로 이어져
있음도 사실이지요.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고 난 이후부터 계속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좀 더 잘까 말까부터 시작하여 잠드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의지로 선택되는 부분만이 우리네 몫이 되는
겁니다.
좀 더 범위를 넓혀도 그렇지요.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이것이 과연 운명이냐, 숙명이냐를 고민하는 일은
어쩌면 좀 더 자신의 선택에 무게를 실을 수 있는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다만 도저히 바뀌지 않는 숙명적인 일을 맞는다해도,
자기 스스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 부분이라면 불행도
기꺼이 자기 몫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인생을
보다 겸허히 사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아있으면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죽어 이 몸이 흙이 되지 않는 한, 내 의지로 선택한
운명이 결코 헛되지 않게끔 열심히 사는 일.
그 끝에 설령 서글픈 숙명을 맞이하더라도 열심히
살면서 자신의 운명에 최선을 다한 이에게는 결코 후회
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내가 배운 역학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말 하나.
아무리 자기가 타고난 팔자가 그랜저같이 좋은 팔자라
해도, 그 가는 길이 자갈길이면 설령 그랜저라고 해도
바퀴가 터지거나 차가 망가지지요.
비록 자기의 팔자가 타고나기를 티코같이 보잘것 없이
타고 났더라도 정작 고속도로를 만나면 일사천리로 잘
달릴 수 있어서 자갈길을 만난 그랜저보다 더욱 순탄하게
달릴 수 있다는 것.
그랜저인생, 티코인생은 숙명적인 부분이라 바뀌지 않는
다해도....
자신이 노력하여 그 가는 길을 고속도로로 만들면
그 어느 인생이라도 모두 순탄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를 때때로 되새기면서 내 인생이 지금 자갈길
인가, 고속도로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정작 숙명적인 부분.. 내가 그랜저인생인지, 티코인생
인지는 아마도 내 관뚜껑을 닫을 때에야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구요.
다만 이 한번뿐인 인생살이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살다 가고 싶을 뿐입니다.
설령 인생의 자갈길을 만났다해도 내 중심 흔들리지
않으면 차 자체가 아예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희망이 아마도 그 힘을 보태줄 것입니다.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