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모임이 세 개나 겹쳤다.
공교롭게도 시간대가 삼십분씩 여유를 두고서 말이다.
고민고민 하다가 맨 처음 시간대인 총동문회부터 참석키로 했다.
줄줄이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기다리실텐데
후배 주제에 전화까지 받고서 안 갈 수는 없었다.
예전 같으면 둘째넘 저녁을 챙겨주고 먹는 걸 보고 나와야 하니깐
마음이 조급했겠지만 큰 아들 제대 후부턴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야말로 ''''쨍 하고 해 뜰날''''이 되어 버렸다.
''''엄마는 너희들이 그렇게 맛있게 잘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두 녀석이 머릴 맞대고 닭도리탕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서 한 마디 했다.
어느 시인이 ''''새끼 입 속에 밥 들어 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라고 했던
한 귀절이 딱 내 마음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막 나오려는데 내 말을 듣자마자 둘째녀석 왈,
"엄만 원래 안 먹어도 배가 불러 있잖아요~" 한다.
"뭬~~야??"
"야~
내가 그 말 꼭 하려고 했는데 왜 네가 해 버려"
내게 들리라고 짐짓 소곤거리는 척 말하는 큰 넘.
형제가 작당을 해서 나를 놀린다.
나도 모르게 내 아랫배를 한 번 내려다 보고 두 눈을 부라리며
"느이들~ 까불지 마~ 혼 난다~"
엄포를 주고 현관문을 막 나서려는데
" 열심히 다이어트 운동하고 오세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이 합창을 한다.
앞으로 저 녀석들에게 얼마나 놀림을 당하고 살꼬...
두 번째 모임은 시간이 늦어 버려 결국 못 가게 되고
지난 주 일본 출장을 다녀 온 단짝 친구에게로 향했다.
아우 시험공부 봐 주라고 큰 넘에게 임무를 주고는
간식도 챙겨주지 않고 나왔단 생각이 들어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했다.
웬지 장남 목소리가 뾰루퉁한 볼 멘 소리로 들린다.
이상하다...
다시 한 번 말을 붙여 보니 확실하게 무언가 짜증이 나 있는 말투다.
하기야
제대 후 거의 일 주일 가까이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짜증도 날 법 한 일.
그렇다고 감히 이 에미에게 짜증을 내?
문자를 보냈다.
''''어찌 감히 하늘 같으신 에미에게 짜증을 내는고? 이런 쯔쯔쯔...''''
화 낸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지라
아들녀석의 반응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친구도 여독이 덜 풀린 듯 피곤해 보여
들어가라고 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둘째는 잔뜩 웅크려 있고
형은 뭔가가 골 나 있는 모양새다.
분위기가 어째 좀 험악한 낌새가 느껴진다.
''''감자라도 쪄 줄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반응을 떠 보기 위해...
''''아뇨!''''
단호하고 짧은 대답.
흐미~ 무서워라...
안방에 들어 와 느긋하게 텔레비죤을 켰다.
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이 한가로움.
난 둘째넘에게 시험 공부하라고 소리지르고
녀석은 짜증 내고 날 약 올리고 난리였을텐데...
장남이 아우를 책임 져 주니
이렇게 내가 편하구나 콧노래까지 나오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는 거 같다.
볼륨을 급히 줄였다.
"도대체 넌..."
뭐라곤가 큰 녀석이 소릴 치는 거 같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아이들 방 가까이 가서 엿들어 보니
아우를 호통치고 있는 가 보다.
"몇 일 전에 한 거 라면 내가 암 말도 안한다.
방금 전 중요하다고 별표까지 해 놓고 그걸 까 먹어?"
"다시 외워!!"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에고, 너 이 놈 참 쌤통이다.
어휴~~ 고소해라.
내가 뭐라 했으면 대꾸하고 날 약 올리고 혈압 오르게 했을 녀석이
제 형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고소하기만 하다.
혼자 숨어서 킥킥대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집 앞이란다.
"왜?"
"으응~
너무 재밌어서... 킥킥킥"
"무슨 일인데...?"
"지금 작은 넘이 큰 넘에게 혼 나고 있거든.
아휴~ 고거 참 쌤통이다~ ㅎㅎㅎㅎ"
현관 문 여는 소리가 나고
아들녀석들 인사말이 들린다.
"공부 잘 되니...?"
시치미 뚝 떼고 묻는 남편 목소리.
아마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지긋이 물고 있을 터.
"어째 넌 형이 집에 온 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거 같다아~?"
기어코 한 마디 던지는 능구렁이 아빠...
공부가 끝난 듯 안방으로 들어 오는 둘째의 표정이 밝지 않다.
"집중해서 공부를 안 하니깐 그러지..."
"엄만 머리 아플 때 공부하면 잘 외워져?"
그래도 꼭 자기 변명을 하려고 드네...
큰 아들에게 갔다.
"글쎄...
방금 전에 중요하다고 외우라 해서 외워 놓고도
다시 물어 보니까 모르는거야..."
아직도 노기가 가시지 않은 표정.
"어휴~ 무서워라~
난 너 무서워서 이젠 느이들 방 근처에도 안 갈 거다~"
씨익 웃는 표정을 등뒤로 느끼며 간식을 챙기러 주방으로 향했다.
언제 호통쳤냐는 듯 아우와 함께 컴 앞에서 두런두런 얘길 나누고 있는 형.
컴은 아우가 더 잘 하니 아마도 조언을 구하고 있는 듯 하다.
CD를 들고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는 아들넘들을 보자니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온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 모여 있다.
"내일은 친구 만나러 갈래?
엄마가 아우 봐 줄께..."
큰 아들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아니에요.
기말고사 끝날 때까진 그냥 있을께요."
경쾌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안심이 된다.
형만한 아우 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엄마,
형아가 스트레스 쌓인가 봐...
제대하고 한 번도 친구 만나러 못 나갔잖아...''''
몇일 전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하던 둘째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녀석들이 정말 사랑스럽기만 하다.
아휴~
기특한 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