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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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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BY my꽃뜨락 2001-09-21



나는 오지랖이 넓다. 안해도 될 일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탓할 이 아무도 없음에도 괜히 나서서 참견하느라 동분서
주하기 일쑤다. 하다가 힘들고 짜증나면 내가 미쳤지. 하
여튼 팔자소관이야,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일도 비
일비재하다.

말썽 잘 부리고, 뒤퉁맞은 마누라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
는 남편의 첫번째 걱정, 그것은 내가 돈심부름을 겁없이
잘 하는 짓이다. 누가 어렵거나 힘들 때, 돈 못구해 쩔쩔
매며 고통스러워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꼴을 못본다.

내 수중에 돈이 없으면 사방에 전화질을 해대 어떡해서든
지 돈을 마련한다. 막막할 때 도움을 받아 고마워하는 친
구들 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흐뭇해 하며. 그런데 이 놈의
돈심부름이 할 때는 그리도 행복한데 그 뒤끝이 문제다.

형편이 꼬여 갚을 날자에 약속을 못지키는 웬수같은 종자
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 믿고 흔쾌히 돈
구해준 사람에게 나도 몰라 하며 오리발을 내밀 수는 없고,
대신 막느라고 똥줄이 다 탄다.

이 웬수야,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죽겠다. 언제까지
갚지 않으면 너 죽을 줄 알아라...이럴 땐 완전히 놀부
마누라모양 악장을 치며 전화통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
른다. 이러니 성깔 더럽다고 소문나고, 인심 잃고, 품위
손상하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건만 그 사건 마무리되
면 언제 그런 일 있었냐싶게 그 짓을 또 한다.

이쯤되면 병도 아주 고약한 병이라 할 수밖에. 두번째로
못말리는 짓거리는 중매를 잘 서는 일이다. 옛말에도 잘
하면 술이 석잔이요, 못하면 뺨이 석대라 하는데...이 어
려운 일을 나는 겁없이 끼어들어 차치고 포치고 야단이다.

처녀, 총각은 물론 이혼해 혼자 사는 이나, 사별해 외롭
게 있는 이들만 보면 그만 참지를 못한다. 사방을 수소문
해 홀아비 홀어미 구하느라 난리를 친다. 그리해서 엮어
준 커플만 해도 세쌍이 되니 죽어서 천당가는 것은 따논
당상이다. 이 짓도 성공했을 때는 엄청 즐거운 일이지만
결혼해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야말로 골을 때린다.

완전히 중매장이가 에프터 서비스까지 책임져야 하는 꼴
이니, 사니 안사니 난리부르스를 치는 것들 앞에 놓고 윽
박지르고 달래고 나도 덩달아 난리를 치게 돼니 이 꼴을
옆에서 보는 내 남편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예전 같으면 망령 날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속절없이 나이를 먹었다. 그러니 철 들 때도 되지 않
았을까. 해서 나는 이제 엉뚱한 짓 그만 하고 나름대로 품
위를 지켜 쪼그라진 남편위신도 세워주고, 말년을 잘 보내
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결심을 흔드는 일이 생겼다. 남편과 아
주 가깝게 지내는 후배 중에 몇년 전에 이혼을 한 친구가
있다. 학벌 빵빵하고, 능력있고, 재산있고...성격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이였다. 오다가다 농담 따먹기로 킬킬대는
사이지만 오만하고 날카로운 그 성격이 맘에 안들어 홀애
비로 살든말든 관심이 전혀 없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재혼을 하려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였다.
재혼 상대자론 성격 밝고, 성실하고,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여자면 바랄 게 없다고 하며 하필 그 표본으로 나를 꼽았다
는 것이다.

아니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 인생의 쓴 맛 단 맛 다 보
더니 철이 들었는가베? 이마빡에 붙어있던 눈이 제 자리로
내려왔으니 사람 많이 변했다. 가만있자. 그 정도면 참한
색시감 소개해 줘도 괜찮겠네...남편후배의 칭찬 한마디에
흐물흐물해진 속없는 나, 즉시 색시감 ?기에 돌입했다.

마침내 후보가 구해졌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후배 중에
혼기를 놓친 마흔다섯살의 처녀가 있었다. 직업은 간호사
로, 약간 퉁퉁하고 평범한, 별 특징이 없는 처녀였다. 친구
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몇번 얼굴을 본, 면식이 있던 처녀
라 더 알아 볼 것이 없었다.

이쁘지는 않지만 살결 곱고, 헌신적이며 성실한 백의의 천
사이니 나보다는 낫겠다. 게다가 키도 160 정도는 되니 여
자로선 아담한 체구로 안성맞춤이다. 아들 둘 달린 이혼남
에게 혼처자리가 처녀이니 그또한 더 바랄 게 없고...다만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남자의 연식도 마흔 아홉이니
그 정도면 아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되자 성
질 급한 나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양쪽에 전화을 해 이러저러한 조건을 설명한 뒤 다음 날
까지 의향을 밝힐 것을 통보했다. 다음 날, 여자쪽에선 볼
생각이 있다는 연락이 왔는데 남자 쪽에선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이 인간이... 눈썹 밑으로 눈높이가 낮아졌나 했더니
그게 아닌개벼. 속으로 쓴 물이 올라왔다.

밤 10시가 넘어 전화가 왔다. 형수, 신경써 줘서 정말 고맙
다고 극구 치사를 한 뒤 삼십분을 주저리주저리 줏어 삼켰
다. 요진즉슨 전 마누라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요인에 대
한 고찰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성장한 탓인지 성
격이 어둡고, 꼬여 사람들과 융화를 잘 하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 라면 한개로 하루를 버텼을 정도로 극심한 가
난에 허덕였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을 정도로 폐쇄적인 사
람이다. 없이 산 탓인지 돈도 제대로 쓸 줄을 모르고, 시댁
식구에게도 며느리 도리를 도대체 할 줄을 몰라 나를 괴롭게
했다.

나중에는 음울하고 꼬인 와이프의 성격이 아이들에게 옮을 것
같아 전전긍긍했는데, 그 와중에 애인까지 생겼다. 그래서 이
혼하게 됐는데, 다시 만나는 사람은 평범하고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 구김살 없고, 활달한 여자였으면 좋겠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나를 받쳐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여자면 더
욱 좋겠고,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성품
이면 정말 좋겠다...참, 기가 막혀서. 제시한 조건을 충족시
킬만한 유능하고 성격좋은 커리어 우먼이 미쳤다고 오십을 바
라보는 새끼 딸린 이혼남을 선택하겠냐?

그리고, 형수같은 여자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소리나 하지
말지. 나 갖고 노는거냐? 이 나쁜 시키야!!! 울화통이 터져
한바탕 욕을 퍼붓고 알아서 장가 잘 가라고 전화를 끊었다.
참 나도 한심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
지. 돈 드는 일 아니고, 그냥 빈 말로 추겨세운 것을 진짜로
알아 듣고 그 난리를 쳤으니...으이구~ 언제 철이 들까?


이런 한심한 여편네 만난 우리 남편 정말 안됐다. 처복없
는 불쌍한 내 남편, 보상하는 마음으로 정말 잘 해야지.
술먹고 개겨도 웃으며 봐주고, 맛난 음식 유난히 받치는
남편 입맛에 맞춰 요리도 개발하고...음, 또 출근할 때
이불 속에 누워 당신 열쇠 갖고 문 잠그고 나가. 이러던
것 반성하고 반드시 의관 정재해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가 남편 타는 것 보고 들어 와야지. 그런데 어쩌나?
남편 말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