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당연히 난 학부모가 되었다.
1반, 2반... 무슨무슨 반이 아니고, \'\'\'\'까치반\'\'\'\'이 된 아이를 따라
나는 1학년 까치반 학부모 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학부모가 되었다는건 얼마나큰 마음의 준비와 함께 새로이 태어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되는 일인지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때만 해도 난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해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문제들.. 그리고 관계들을 정리하느라 거의 반년을 소비한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책속에 파묻혀 지내기를 좋아하는 여린 마음의 딸아이가 들여놓은 사회로 가는 첫번째
관문에서 딸아이가 받아 들인 혼돈의 한조각을 나 역시도 똑 같이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힘들어 했었던 학부모 초년이었다.
그런 와중에 결성된(?) 딸아이의 반 엄마들과의 모임은 여러가지로 미숙한
내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안목과 함께 삶의 윤활유 역활을 톡톡히 해주었던 것 같다.
다섯명의 엄마들,.... \'\'처음으로\'\', \'\'첫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초보학부모\'\'엄마들의 모임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학교 바로뒤편에 살고 있는 우리 아파트 엄마들로
한정하다보니 다섯명의 엄마들이 모였던 것이다.
회원수도 작고, 그저 화목을 도모하는 \'\'화목계\'\'에 다름아니었지만
우린 근사한 이름을 갖고 싶었다. 고민하다 이름을 정한건 아이들의 반 이름을 딴
\'\'까치둥지\'\' ,,,,둥지는 우리가 엄마들 이므로 까치반인 우리 아이들을 포근히 감싸준다는
의미로 그리 지은 것이다.
내가 이사를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 이외도 자주 만나곤 했었다.
비가 오니 누구네 집으로 와서 부침개를 부쳐 먹자면
누군 오징어를 들고 누군 주전부리용 과자를 들고 그 집으로 모였다.
날이 화창하면 화창한대로 냉커피 맛나게 타주겠다고..
겉절이가 맛있어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열무김치가 맛나게 익었으니 보리밥 해먹자고...
그리고 직접 기른 상추를 뜯어다 놨으니 삼겹살을 구워 먹자고 한건
주로 예서 엄마였다.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던 예서 엄마는 그 넉넉한 인심 만큼이나 손이 커서
음식을 한꺼번에 많은 양을 만들어 여기저기 나누어 주는걸 좋아했다.
당연히 음식 솜씨도 좋아서 부침개면 부침개, 수제비면 수제비
그리고 열무김치에 보리밥넣고 비벼먹는 보리밥비빔밥 까지... 못해 내는게
없는 만능 요리꾼이었으므로 우린 곧잘 상추며 오징어를 들고는
예서엄마를 찾아가곤 했었다.
나이도 우리중 가장 많았던 예서엄마는 가장 먼저 그 아파트 단지에서
이사를 가버려서 남은 우리들이 \'\'이젠 누가 그 맛있는 수제비며 부침개 부쳐 줄까?\'\'
라며, 사람이 떠나는것보다 수제비랑 부침개가 더 생각날거라는 농담을 주고 받고는 했었다.
그뒤로 예전 처럼 자주 볼수는 없었지만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참여 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겠다.
까치둥지의 두번째 멤버인 정민엄마, 정민엄마는 개인적으로 나랑 가장 가까운 사이다.
어느 모임이든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게 마련인 것처럼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고
둘의 취향이 비슷해서 인지 우린 늘 붙어 다니는 단짝이었다.
살림에 있어서도,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도 아내로서 내조에 있어서도
가장 확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이 정민엄마였다.
아이도 그런 엄마의 열성적인 교육에 부합하며 학교에서건 어디서건
똑똑하단 소리를 듣고는 했다. 그런 아이 옆에서 우리 아이를 비교하며 난 또 얼마나
부질없는 마음에 시달렸던가...우리사이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끼어들던 그 비교심리에
휘둘렀던 마음은 얼마나 부질없었던가...
누구보다 궁짝이 잘 맞았던 정민엄마와 나는 그즈음 한창 유행처럼 번지는 \'\'건강달리기\'\'를
함께 하기로 하고 서둘러 저녁 식사를 끝내고는 8시 30분에서 한시간 동안 아이들 학교
운동장을 돌고는 했다.
아직 우린 둘다 작은 아이가 있는 처지에서 저녁마다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우린 정말 끈기있게도 토요일 하루만 빼고는 일주일에 여섯번을 운동장 돌기를
멈추지 않았었다.
그게 거의 일년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한 아줌마들이었다.
특히, 나보다도 정민엄마가 더 적극적이었는데
주말에 여행을 갔다가도 그 시각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그 시각에 맞춰
서둘러 올라오기도 했었다.
덕분에, 늘 고민이던 뱃살을 눈에 띄게 빼고는 더욱 예뻐진 정민엄마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까치둥지 세번째 멤버는 우리회원중 가장 나이가 어린 강준엄마다.
나는 누구보다 강준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해 오는데 그건
우리중 누구보다 아이를 위해 헌신한 엄마였고,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고 순수했기
때문이다. 머리는 똑똑한데 행동발달에 장애가 있었던 아이 때문에 여러가지로
힘들어 했던걸 옆에서 지켜보며 우린 늘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곤 했었다.
수업중 불쑥 불쑥 일어나 선생님께 갑작스런 질문을 해대는 바람에
다른아이들이 그앨 놀리곤 했었는데 그것보다 덩치가 반애 중 가장 컷던 강준이가
다른 애들이 때리는걸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한대 때릴줄도 모른다고,,, 엄마가
걱정했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니 아이들은 강준이 옆에 가려고도 안하고
급기야는 \'\'\'\'왕따\'\'\'\'시키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때 강준엄마의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했을까?
다행히 나이가 한살 더 먹어가면서 그리고 최근에 다시 시작한
치료를 받으면서 강준이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부디, 아이를 처음으로 학교에 보내고 모든것이 그저 하느님 의지대로 잘 되어지기를
바라며 백일동안 새벽기도를 다닌 강준엄마의 그 가슴저린 모성애가 언제나
빛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형이.정훈이 엄마로 말할것 같으면
쌍둥이 형제를 기르면서도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잘하는 \'\'\'\'한깔끔\'\'\'\'하는 엄마였다.
그래서 늘 쌍둥이 남자애둘은 깨끗한 옷에 깨끗한 운동화를 신은
멋쟁이로 불리워 지곤 했다.
이란성 쌍둥이인 둘은 누가 보아도 형과 동생이었다.
형인 정훈이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행동도 어른스런운 반면,
동생 도형이는 키도작고 덩치고 작은데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영낙없는
막내였다. 쌍둥이 엄마는 그런 두 아이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기르면서
아이들이 커서 못 입게된 옷가지를 정리해서 때가 되면 우리 아들아이 입으라고
물려주곤 했어서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가는 엄마이기도 하다.
우리 회원들의 비교 대상이 되곤 했던 쌍둥이 엄마와 나.
대단히 현실적이고 마당발인데다 정보통인 쌍둥이 엄마는 우리동네를 포함해
학교와 관련된 주변의 일이면 모르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다섯엄마의 입에서 나온 이름중 그 엄마가 모르는 이름이 없을 정도였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과 행사도 빠짐없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해서
우리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 이사오기전 밤을 새워 내 글이 실린 작은 월간지에
한자한자 그간의 행복과 앞으로의 그리움을 적어 편지를 전해주고 온 나,
이렇게 다섯이 어제 청량리에서 랑데뷰를 했던 것이다.
서울과 마석의 중간지점을 정하다 보니 청량리가 가장 적합하다
의견이 모아졌지만 사실은 혼자 마석에서 서울로 올라올 나를 배려해준
안배였다. \'\'까치둥지\'\'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켜 나가자는 회원들의
마음깊은 배려를 느끼며 서울로 가는 길... 내리던 비가 그치고 청량리역에
햇살이 잠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음달, 한여름의 뜨거움이 우릴 맞아줄 것 같은 7월의 모임이 벌써 기다려 진다.
어제 한달만에 만나고 헤어졌던 얼굴들이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