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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05

화장대 위 지갑


BY hansook83 2003-06-12

지갑 아무데나 두니깐 참 좋지
남편이 하는 말입니다.
말해 뭐 합니까.
좋다 마다요.
지갑 뿐인가요, 카드, 은행 통장, 주민등록증, 도장까지
신경쓰지 않고,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게 너무 행복합니다.

오래전
집을 경매 당해 어떻게든 삯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가구란 가구는 가져가지도 못하고
이불과 옷 몇가지, 약간의 살림살이만 가져가야할 형편이기에
짐 쌀 준비를 했습니다.

장신구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는
여유있을 때 아파트 아줌마들 성화에 금덩어리계를 해서 적지 않게
모아 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거라도 팔아 보증금을 마련해야 했기에
밤새도록 장롱을 이잡듯 뒤졌지만 나오질 않는 겁니다.
이건 분명 내가 모르는 새에 도둑이 들은게 분명해
스스럼 없이 드나들던 이웃도 색안경으로 보게 됩니다.
신고해야지

남편의 철지난 양복을 짐싸다 무심코 안 주머니를 살피던 나는
주머니 속에서 나온 스무장이 넘는 전당포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꼴난 장신구 몇 개도 전당포 쪽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절망!
절망 그 자체 였습니다.
집을 잃어 살길이 막막했던 현실 보다도
인간 자체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남편의 도박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게된 시작이었습니다.

은행카드가 생기고는 문제가 더 심각해 졌습니다.
불어나는 카드 빚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드를 뺏아 잘라버리면 뭐 합니까
주민등록증과 도장만 가지면,
아니 본인인 것이 확인만 되면 곧바로 재 발급이 되는 걸요.
주민등록증과 도장도 뺏었지만 아무소용 없었습니다.
다시 신청하니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저 카드를 통해 현금서비스를 받고, 카드 사용금액이 쌓이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이었지요.

깜빡하고 지갑을 감춰두지 않으면 영락없이 돈이나 카드가 없어지고
남편은 또 집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코딱지 만한 집안에서 감추다 감추다
나중엔 내가 찾질 못해 쩔쩔매니.......
정말이지 내 인생이 비참했습니다.

남편은 점점 피패해져가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술을 먹지 않으면 손을 덜덜 떨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길가에 술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 얼굴을 확인하고 다녔고
지하철이 끊긴 역전마다 다니며 웅쿠리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다녔었죠.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변해가는 내 모습에 내 자신이 무서웠습니다.

그런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밉지도 않고, 걱정도 안되고, 원망도 안되고,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영화 속의 한 인생같은, 그런 감정...
악몽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돈 아무데나 놔도 되니까 참 좋지

그렇습니다.
이젠 지갑도, 현금도, 카드도, 은행통장도, 도장도
남편도 알고 나도 아는 항상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은 남편 지갑에 항상 챙겨져 있고요.

내일 모레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도 없고, 안정된 직장도 없지만
있을 곳에 있고, 놔둘 곳에 놔둘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동안 참아줘서 고마워
지금 이렇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나또한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준 남편이 고맙고 대견합니다.

이젠 남편의 지갑엔
만원 짜리도 있고, 천원 짜리도 있습니다.
오백원 짜리 동전이 생기면
피아노 위에 있는 연두색 돼지 저금통에 저금도 합니다.

남편은 용돈으로 아이스크림도 사오고, 오징어 땅콩도 사옵니다.
내 마음이야
하면서.

아! 정말 행복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