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휴! 속상해=속에서 천불난다
약올리지마=헛베통 히띡 디낄래?
빨랑빨랑 오너라=색키 오그레이
그만해!!=쫌!
할머니 안녕하세요?=할맨교??
보잘것 없네=문디 깡출이 같데이.
와들와들 떤다=삼발사발떤다
감기는 괜잖어?=약 뭇나?
부엌에 가서 간장좀 가지고와라=정지에가서 지름좀 가지온나<새댁시절 식용유 갔다 드렷음.>
와아 !크다~=좃나 크다!!
밥먹어라?= 한술 뜰래?
며늘이 어디 갔어?=젊은 거는 어데 갔노?
곱게 화장하고=부악때기 처럼 치바르고..
나와 결혼 합시다=내 알 낳아도.
저 산을 향하여!!=만디를 전자서!
어머나!그러게 말이다 ...=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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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상도 남자랑 사는 어느 여인의 비극..>
어머나!오늘따라 바다가 너무 멋있어요=바다가 니보고 모라카드나?
이음식 참 맛잇다..=가시나 맛은 알아서리..
여보 배아퍼..=아까부터 디게 쳐 무글때 부터 알아봤다 카이 밴소가 떵누라!!
바람좀 쏘이러 가요..=창문 열어바라..
여보..창밖에 달이 너무 이뻐요=대가리치바라.안보인다카이..
우리 앞산 등산가요..=앞산 집에서도 보이는데 멀라 가노!!<,이슬님 남편 버젼>
클래식 음악이 참좋쵸?=용필이 노래가??
콘도 빌려 놀러가요=콘도도 아파트 같은데 멀라 멀리까지 가노?니 지정신이가??
여보 외식하러가요..=순대국 집 가자..,<요말에 전 뒤로 발라당 자빠졌음>
양식 먹으러 가요..=니글니글 한거 말라 묵느?그돈이면 삼겹살이 얼매너치친줄 니아나??쌀 반가니니 값이구만...
여보 가을이오니 가슴이 설렁하네요.=옷더 입그라!!
칵테일 마시고 싶어라..=쇠주 일비에 노가리 꾸버 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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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동안 경상도 땅에서 터득한 것입니다>헤~~~
도영..
강원도 땅에서 낮설고 물설고 문화가 다른 포항으로 시집온지 벌써 24년이 되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남편을 따라 엉겹결에 결혼식을 올리고
일박이일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으로 들어오니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타이틀 과 술사 심함 아버님과 매서운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직장이 멀리있는 종시숙들.종시동생들은 어쩔수 없이 분가를 해서 행사때만
오시면 되었지만 포항이 직장인 남편과 저는 시골에서 시어른들을 모시고 살았답니다.
시어른들 시동생 셋..우리식구 넷..일일이 불을때서 밥을 짓고 보리쌀을 삶고
빨래를 삶아야하는 일은 이십대초반에 저로서는 하루하루가 고단했습니다
대소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주위 환경은 참말로 조심스러웠고 종가집 종부는
크던작던 대소가 행사에 빠지면 안되는 의무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탓에 항상 일거리들이 넘쳐나서 도시에서 자란 저로서는 힘에부쳐
하루하루를 휘청거리면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혼의 달콤함도 태어난 아이들의 맑은 미소와 재롱도 스트레스와 만성피로가 겹쳐져
누릴 여유가 없었지요.고된 육체적인 일보다 시아버님의 술주정과
청량고추보다 더 매운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어린나이의 저로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시어른들은 저의 정신세계를 시험이라도 하는듯
두아들을 낳고 세월이 흘러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혹독한 시련에 부딫치며 살다보니 언젠가는 포항을 탈출 하고픈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는 주문처럼 외우고 살았답니다..
\"나는 언젠가 지긋지긋한 포항땅을 뜨고말거야.\"
\"나는 다혈질적이고 욕 잘하고 거친 포항에서 늙어 가지는 않을테야\"
\"난 내가 원지 않았던 종가집 종부라는 타이틀이 너무싫단말야..\"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요 .강원도가 고향인 철없는 젊은 새댁은
포항땅을 탈출 하고싶은 열망으로
바람이 가득든 풍선처럼 팽창 되어 콕 찌르면 펑하고 터질듯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 얼음판을 뽀죡구두를 신고 걷는듯한 긴장된 일상속에
시아버님의 반복되는 술주정은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포항땅에 마음을 못부치고 정이 든다는것이 쉽지가 않았답니다
어느 봄날이였요 부산에 사시는 대소가 아지매가 저희집에 들르셔서
뒤란으로 살짝 불러내시더니 \"질부야 힘들지만 극복을 하게나..\"
아..아지매의 그 말씀 한마디가 내마음속 우물에서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평소 \"힘드는데 분가를 해야할텐데..\"우선 달콤한말만 해주었던
다른 아지매들의 말을 듣다보면\"그렇치 ..도저히이집에서는 살수가 없단말야..
하는 생각이들면서 시집에서 겉돌기만 했습니다
분가를 해라..에서
\"극복\"을 해야 한다는 부산 아지매의 쓴 말 한마디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극복을 하라?극복...\"그제서야 저는 주위 환경만 탓하고 빠져나갈 생각만 했을뿐
극복할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은 제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깨달음 이였지요.
달콤한 말만 했던 집안 아지매들에 선심성 위로보다 현명한 부산 아지매의 충고가
제가 시집살이를 하는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되어서
차차 시집분위기에 적응을 하여 사는 나를 보았지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끝에 꿈에 그리던 분가를 하고
동서들이 들어오고 조금은 수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종갓집 종부란 굴레는
주홍 글씨처럼 제게 억눌림으로 저를 죄어왔습니다.
\"명색이 맏 며늘인데 분가를 하다니.\"
\"내가 부모 버리고 나온것은 아닌가 나도 두아들을 키우는데..\"
부모를 버리고 나왔다는 강박관념에 tv에서 시부모를 모시지않으려는
드라마 내용만 나와도 가슴이 절여왔습니다.
게다 아범님 종반이 수십분이되시니 집안 행사는 어찌나 많던지요 .
분가만 하면 끝날줄 알았던 나의 고행은 나를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언젠가는 내고향 가까이 가서 살테야..경상도 땅은 도저히 정이 들수가 없는곳이야 ..
포항땅을 떠야지 발칙한 생각을 또다시 하기 시작 했습니다..
세월은 속수무책 흘러서 포항 탈출은 마음에만 있을뿐
우리 아이들에겐 고향 친구가 생기고 학교 친구가 생기면서 내가 그렇게 뜨고싶어하던
포항이 아이들의 주무대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변할것 같지않던 시어른들 또한 처음보다 후해지셧만 가끔씩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우울의늪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목욕탕 거울을 비친 저를 보니 제 나이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경상도 아지매가 무표정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폐경기 증세가 오면서 그동안 절제하고 인내하고 살았던 감정들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남은 생에 대한 허허로움..목까지 뽀글뽀글 올라오는 정체를 알수있는 분노..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허기..
왕성한 사회생활을 하는 남편과 날개 달아 비상하는 두아들에 비해
쪼그라들어가는 나의 왜소함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갱년기 증세로 나의 정신세계는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듯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종갓집 종부로 시집와서 일에 치여 힘든 시절에는
절망을하고 갈등을 하다가도 그래도 젊음이 있고 어린 두아들들이
희망이고 꿈이였기에 힘들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마흔넷에 찾아온 갱년기란 불청객은 .예측불허에 흔들리는 여심이 되어 갔습니다.
어느날은 멀쩡하다가 어느날은 사소한거에 폭팔을 하며
부족한 호르몬이 나의 감정을 좌지우지 하였지요
폭풍전야의 불안한 평화는 남편과에 위태로운 일상으로 이어지고
낱낱히 글속에서 밝히지 못하는 헤프닝들이 있었습니다 훗~
그래서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려 나를 다스리려
산으로 들로 다니다가 보잘것 없는 시골집에 둘러 쳐진
탱자나무 울타리에 시선이 머무르고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 했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속에서 미래의 내꿈을 발견을 했지요
살아온날보다 살아갈날이 적을지도 모르는 허허로운 남은 생..
젊은날 내청춘을 짓누르게 했던 이땅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 보는거야
귀농을 하여 땅을 가꾸면서 마음에 윤기를 찾자고..아마 그때 결정한것 같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보고 귀농을 결심한후
큰 아들과 합동작전으로 변화를 싫어하는는 남편을 약 2년 동안 설득해
50대와 그이후에 꿈을 가꿀 땅을 사는데 성공 하였습니다.
집 지을 땅만 내게 있다면..
많이도 안바래..약간의 텃밭과 약간의 꽃키울 땅만 있으면..
간절하게 바랬더니 피그말리온 효과인지 몇달전 현실로 이루어져서
기계쪽에 오백평 가까운 땅을 사게 되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정말로 없는 형편에 이리저리 끌어모아 산 땅입니다.
짧게는 오년 넉넉잡고 십년후에는 집을 짓기로 계획하고 산 땅이지만
이제는 땅을 갖고싶은 열망에서 땅을 가꾸고 싶은
또 다른 열망으로 욕심이 나기 시작 했습니다.
십년에 세월은 너무 길고 오년후에 집을 짓기로 작정을 하고나니
오년이란 세월이 더디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이드는것이 싫어서 세월을 한탄 하던 얼마전 제모습에
나의 이중성을 보았답니다.
오년후 아니 십년후에 집을 지을 계획이였지만 땅을 사놓고 보니 또다른 욕심이 생겼습니다
집지을 형편은 디집어바도 똑바로 보아도 안되고 해서
집 지을 공간만 남겨놓고 우선 땅 부터 가꾸기로 했습니다.
요즘 하루에도 몇번씩 흰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가 다시또 그리고 있습니다.
땅 맨끄트머리에 뒤란이 될만한 공간을 남겨두고 집을 짓고
그 뒤란에 대나무를 심을 계획입니다.
울타리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뺑 둘러심고 오가는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지않아도 보일만큼 적당한 높이로 키우겠습니다.
석류나무와 매실나무를 옆옆히 심고
배나무를 심어 늦은 봄날 달빛에 비치는 이화를 보고싶습니다.
하얀 목련이지고 곧 피어날 화려한 넝쿨장미를 보려면
마당 가운데를 피해서 기둥을 세우고 터널식으로 만들 철사도 사야겠지요.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넝쿨장미가 붉은 터널을 이루면
그 아래 평상을 놓고 유월에 바람에 코끝을 자극하는 장미향을 듬뿍 맡으며
한잔의 차를 음미하고도 싶습니다
텃밭의 크기는 자급자족하고 지인들이오면 나눠줄 만큼의 공간만 만들겠습니다.
먹을것이 남아돌면 귀히 여기지를 않을것 같기에요..
우리 부부는 황토 벽돌을 찍는 기계를 사서
황토를 찍어 집을 짓자는둥 그것이 힘에 부치면 작은 황토 찜질방 만이라도
만들자는둥..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황토 찜질방 주변에는 해바라기 를 빼곡히 심을 참입니다.
키큰 해바라기를 보려면 손수 원두막을 세우는것은 당연하구요.
한쪽은 야생화를 한쪽은 순수 우리나라 꽃만 모아서 심으렵니다.
내손으로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어 지금 우리집 베란다
항아리 뚜껑에서 자라는 부레옥잠을 옮기는것도 괜찮겠군요.
지나가는 차량들이 멈춰서서 시선이 머물만큼의 정원을 만들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도 뜨고 싶었던 포항땅에 제꿈을 향하여 흰종이 위에 이렇게 그림을 그려봅니다
여름내내 틈 만나면 내꿈을 심을 그땅을 찿아가보았습니다.
달빛 비치는 늦은저녁에 차를 몰고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바라보기도 하였고 여름비 내리는 어느날 폭우를 뚫고 찾아가기도 했을만큼
저는 남은 생에 꿈을 심을 그땅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꿈이 실현되려면 손도 투박해 질게고 얼굴로 까맣게 그을리겠지요.
그래도 좋습니다.
꿈이 있다는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원동력이라는것을 알기에
그까이꺼 손톹밑 에 때좀 끼면 어떻습니까.
요즘 나의 귀농에 뜨뜨미지근했던 남편도 점점 나의꿈에 세뇌되어 가는
반가운 변화가 보입니다.
지나가다 눈에 띄는 야생화가 있으면 캐오고 싶은 눈치가 역력 합니다
고백 컨데 몇뿌리 캐와서 잘 키우고 있지만서도요
며칠후 땅을 트랙터로 뒤집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년 봄 부터 유실수를 먼저 심고 한평한평 잡초를 뽑아서
꽃을 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5년후에 들어갈 그집 이름을 <들꽃정원>으로 이름 지어 놓았습니다.
<하늘정원>으로 할까했는데 여동생이
\"하하~~언니~~요즘 장례식장을 하늘정원이라 하든데...\"하기에
전화기를 붙들고 깔깔 대며 웃기도 했습니다.
요즘 지난 세월을 돌아다 봅니다
24년전 경상도 땅에 시집와서 힘든 시집살이 시절에 이땅은 제게 냉혹했습니다
꿈도 행복도 보장 받지못할것 같은 이곳을 탈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면서
이땅을 보란듯이 뜨고싶은 위기감도 있었습니다만
두아이들이 에미 없이 자라서 슬픈 눈을 가진 청년들이 될까봐
차마 가지를 못하고 눌러 앉아 산 세월이 부지기수 였지요
그리고 24년후..요즘 ..참고산 세월의 끝맛이 설탕맛 처럼 달지는 않지만
질리지 않은 오이향 같은 은은한 평화에 위로를 받고는 하지요
20대때 내꿈을 접었던 포항 한귀퉁이 시골집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꿈 을 찿아내서 그 꿈을 향해 다가가다보니
갱년기 증세가 희석되어 가는듯 합니다.참 다행스럽습니다
밀려오는 고독도 목에서 올라오는 정체를 알수있는 분노.그리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질것 같지 않던 정신적 허기도 꿈이라는 마약같은 묘약에
마음이 스스로 다스려지고는 합니다
귀농을 하면 몸은 고단하겠지만 마음은 풍요롭겠지요.
비가오면 비 설겆이를 해야하고
겨울이오면 나무에 옷을 입혀야겠지요.
오년후에 그 꿈이 이루어져서 자연을 닮은 촌로로 늙어가기를...바라면서
꿈과 희망은 없고 절망적이였던 이땅에 잃어버린 내꿈을 심을겁니다
내 마음속에서 밀어냈던 제2의고향 포항을 둘러보니 이제는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투박한 말투속에 깊은정이 베어있는 속깊은 인심과
십분거리에 달려갈수있는 아름다운 바다와 신이 빚어낸 내연산이 있는
포항을 뜬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렵니다
왜냐면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자 두 아들들의 고향이며 24년 동안 미운정 고운정 들은
나의 눈물과 땀과 노력이 이끼처럼 끼어있는 곳이므로..
오백평의 땅위에 남은 여생을 채울 여백을 선물한 반전의 땅 포항을 사랑합니다.
2006년 8월 포항에서 명호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