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내 국민학교 시절에 사용하던 최후의 욕. 욕중의 왕.
그 아저씨에게 그 욕이 별명이 된 건, 그 아저씨가 공산당이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 아저씨가 즐겨입던 빨간색 반팔 티셔츠와 그 아저씨의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민머리 때문이었다.
물론 좋은 인연이었으면, 고상한 딴 별칭을 얻었을 텐데...나와는 악연이라...최후의 욕. 빨갱이가 그 아저씨의 별명이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다니던 시절. 나의 고민은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과는 사못 달랐다. 이사 때만 되면 나의 고민은 또 어떻게 새로운 동네에서 박힌 돌들을 빼고 내가 박힌 돌이 될 수 있을까...였다.
국민학교 6학년. 역시 새로운 동네에도 여러 박힌 돌들이 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어떻게 하면 친해질까...궁리하던 나에게 우연히 기회가 왔다.
대구 대봉동. 예전에 제일 예식장이 있던 뒷편의 동네. 그 예식장은 문을 닫아 그 앞의 넓은 공터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동네와 예식장의 경계에는 낡은 판자로 된 담장이 있었는데...
이미 주인이 떠나버린 곳이라 그 벽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벽이 되진 못했다. 판자 여기 저기가 이빨 빠지듯 빠져있고...아이들은 제집 드나들 듯 그곳으로 몰려들어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가곤했다.
물론 나도 그 근방을 어슬렁 거리며 박힌돌이 될 챤스를 노리고 있었고..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내 어린 시절 긴 불행을 예고하는 엄청난 악연과 함께...
동네 남자 아이들이 한쪽에 몰려서 한참 힘자랑에 빠져있었다.
어차피 이빨 빠진 판자를 몇장 빼내와서 서로 그 썩은 판자 부수기에 골몰하더니, 마침내 부서진 판자 6장에 도전...줄줄이 실패하고 있었다. 나에겐 절호의 챤스...
"내가 함 해보까?"
"니가? 참 니 누구고 요새 자주 비던데..?"
"내 요 밑에 집에 이사왔다. 같이 놀자..."
"그래 그라자...ㅎㅎㅎ" 친구들이 다 어색하게 환영해주고는 나보고 얼른 한번 깨보란다.
''이거 못깨면...나는 쪽 다 판다...'' 이빨 꽉 깨물고 약간 떨어져서...냅다 달리다가 공중으로 붕~ 이단 옆차기~~ 얏!
뻑! 6섯장이 다 깨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와!!! 니 세네..."
"뭘 보통이지. 이 정도야 뭘~ 내 여덟장도 함 깨보까?" 행복에 겨운 순간!
갑자기 저쪽에서부터 아이들이 마구 이쪽으로 달려오면서 외친다.
"경비닷!!! 튀라!"
바라보니 빨간 반팔 티셔츠에 머리가 번쩍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이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그 예식장 주인이 예식장을 그만 두면서 건물 유지 관리나 할려고 고용한 분이었지 싶다.. 근데 아이들이 유리창도 깨고 담도 부서뜨리고 하니...자주 순찰을 도시는데..
아~ 운명의 그날 마침 그 아저씨가 나오다가 내가 온 힘을 기울여 격파하는 그 장면을 본 것이다.
아저씨 생각엔 내가 덩치도 또래에 비해 크고하니, 그동안 부서진 판자가 다 나의 소행이라 생각했나보다.
달려오는 그 아저씨의 눈을 보는 순간, 난 그 아저씨가 날 잡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새로운 동네로 이사가면 맨 먼저 내가 하는 일이 동네의 골목길을 다 살펴두는 것이라...나는 바로 튀었다.쌓은 위신 일시에 버리고, 최대한 골목길의 이점을 살려 마구 튀었다.
다행이 아저씨를 따 돌릴 수 있었다. 휴~~~~~~~~~
그 후로 당장 내가 그 아저씨 별명을 ''빨갱이''로 지었다. 다른 고상한 별명을 붙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길고 긴 고난의 세월 6개월이 시작되었다. 그 빨갱이 아재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날 찾아 동네로 나오셨고...그러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앗! 빨갱이닷!"
그 소리 들리면, 난 골목 바닥에 깔린 내 재산 다 버려두고 튀었다. 집이 아닌 방향으로...혹시 빨갱이 아재가 집을 알고 찾아 올까봐.
숨막히는 추격전이 끝나면 어른을 따돌리는라 파김치가 된 나는, 재산 회수는 뒷전으로 하고, 터덕터덕 내 운명을 저주하면서 집으로 가곤 했다. 가끔은 그 빨갱이 아재에게 잡히는 악몽도 꾸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육개월여에 걸친 피말리는 추격전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지루하던 그 악연이 끝나는 날이 왔다.
그 날은 나와 동네 아이들이 너무 노는데 정신이 팔려, 그 빨갱이 아재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걸 아무도 눈치 못채고 있었다.
"이 놈!"
뒷덜미가 낚아채이기 직전!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왔을까?
"으아아아아아아~~~ 악" 하면서 튀어 오른 나는, 나의 비명에 놀라 잠시 손을 놓은 아저씨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놀란 나머지 곧장 집으로 달려 갔다. 아저씨는 잠시 멈칫하다가 뒤따라 달려오고...
근데 문이...문이 잠겨있었다.
"엄마!!! 으악~~~ 문 열어라!!! 엄마!!! 엄마~~~ !!!!"
뒷덜미 채이기 직전, 기절 직전의 경악에 가까운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신 어머니가 문을 열자 말자 아슬아슬하게 집으로 달려들어서는, 대문 쾅! 닫으며 더듬더듬 숨 꼴깍 넘어가면서...
"빠..빠...빨..갱....빨갱이~~~~엄마~ 빨갱이닷!!!"
문 쾅쾅 두드리며 고함 지르는 빨갱이 아재. 내 하얗게 기질린 표정을 가만히 보시던 우리 어머니(이때는 어머니도 어느 정도 내 악연의 내막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 앞에서는 말 한마디 대꾸 못하시던 우리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밖에 어느 남정네가 여자가 있는 집에 이래 소란 떠노..."
"어데서 배운 막되먹은 짓이고!!!"
"내 다들었소...그 썩은 판자가 얼마 한다꼬 어린 아를 몇달간이나 그래 괴롭히노...엉!"
"그 주인오라 하소...내 새판자로 확 바꿔 줄낀께네..."
겁 하나도 안내고 의연하고 당당하셨다.
빨갱이 아재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더니...
"아들 교육 잘 좀 시키소!!!"
고함 한번 꽥 지르고는 갔다.
그것으로 내 어린 시절의 악연은 끝났다. 다시는 빨갱이 아재가 동네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그 일 만으로도 전 어머니에게 효도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오래 사세요.
''아재요. 빨갱이 아재요. 인제 환갑 가찹게 되셨겠네요. 그 때 그 판자 정말 내가 뜯은게 아입니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끔찍하던 아재가 보고 싶네요.''
''빨갱이 아재요. 혹 못 만나더라도 오래오래 사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