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앞엔 봉선화꽃이 피어있었다.
때 이른 코스모스꽃도 함께였다.
매년마다 손톱에 봉선화꽃물을 들였었는데
올해는 정신이 흐트러져서 잊고 있었다.
옛집엔 똑같이 생긴 여러마리 개들이... 아마도 삼대가 살고 있었나보다
나를 보고는 무지 낯설다고, 빨랑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고향같은 옛집 뜰이 좋아 구경이나 할렸더니
성화하는 개들 때문에 뒷걸음질쳐 나와야했다.
담밑으로 굽어진 길이 소롯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길 양옆으로 코스모스가 졸졸졸 심어져 있었다.
덜 자란 코스모스엔 벌써 자주색꽃이 피었고,
그 틈에 봉선화꽃 한포기가 힘겹게 살고 있었다.
꽃은 기운이 빠져 보였다. 여름은 이제 지쳤으니까.
꽃잎은 시들고 초록잎은 빛이 바래져 있었다.
그래도 봉선화꽃을 보니 손톱에 물을 들이고 싶어
시든 꽃잎과 빛바랜 잎을 한웅큼 훑었다.
집으로 들어와 일단 냉장고에 넣어 두고는 여름이 가도록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었다.
남편은 결혼해서 삼년만에 도박빚을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수습할 막다른 길목에서 남편은 나모르겠다며 일도 안하고 한숨만 쉬고
난 첫아기를 업고서 시집으로 시누네로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빚을 갚아달라고 했다.
들뜨게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일상에서
남편은 가끔 나를 들뜨게하고 절망을 주어서 그저그런 일상을 꿈틀거리게 했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발산시켜서
흐릿하게 남아 있던 부부의 정도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정을 미움과 증오와 무관심의 대상으로 자리를 바꿔 앉기 시작했다.
그 자리바꿈하는 세월이 십몇년이 흐르니 나중엔 너는 너 나는 나로 남남이 되어 있었다.
한지붕밑에 두 가족이 된거였다.
쉽게 한 단어로 말하면 '별거'였다.그것도 철저한 별거였다.
어쩌다 한번씩 잠자리를 같이 하는 불완전한 별거가 아닌 완전하고 철저한 별거였다.
"사는게 재미없어. 사는 것이 왜이렇게 복잡하니. 사는 것이 지겹지 않니?"
"공부 잘 하면 뭐한데니...이쁘면 뭐에 쓰니..."
" 야! 야! 공부못하고 인물없는 친구가 더 잘 살더라 뭐."
"돈많으면 싸가지고 땅에 들어가나. 잘사는 것도 밥 세끼 먹더라."
"여자나이 오십이면 미인평등이래. 사람나이 육십이면 지식평등이라드라."
"그 깐 놈의 남자, 사랑 없어도 돼. 더럽고 흔한 사랑. 세상엔 안 변하는거 하나도 없어. 안그래?"
이런 고리타분한 수다로 나를 위로하고,
스스로의 잣대를 만들어 나 자신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심드렁하고 고단하고 드센 팔자를 그냥 그렇게 사는거라며
모가난 내 삶을 둥그렇게 만들려 애쓰기도 했다.
겉으론 이쁜척 지성인척 고상한척은 다했지만
마음속의 아궁이는 싸늘히 식은 재만남아 혼자 있은 땐 이리 날아가고 저리 날아가고,
어둡고 빈 아궁이엔 먼지만 쌓여갔다.
그러더니 어떤 하찮은 곳에서든, 것에서든 유혹되지 않는 마흔이란 나이에
남편은 또 매꿀 수 없는 빚이 있다고 고백하더니
자기 자신도 괴로워 술만먹다 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경찰서에 다녀오던 다음날 밤.
사채업자라며 낯선 사람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압류를 시킨다고 했다.
난 담담하게 내뱉었다.
"오래된 살림을 가지고 가실건가요? 집을 잘라가실건가요?"
이 낯선사람이 무슨 잘못인가.
다만 남편은 없고 돈도 없고 남아 있는 게 나만 바라보는 아이들만 있는데,
낯선 사채업자를 대하면서 끝낼 수밖에 없는 가정을 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겁나고 무서울게 하나도 없는데...무슨말이든 못하겠는가.
어떻게해서든 단란하게 지키려는 가족의 추억을 한 몸에 검어 쥔 채,
남편은 구치소에서 여름날 색다른 추억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래...다 지나고나면 추억아닌가.
그려...다 흘러가고 나면 남아 있는 과거아닌가.
그려 그려 그려....허허.. 참! 허허롭다.
사는것이 매양 바쁘다.
사는것이 그저 어렵다.
사는것이 다 왔다 하면서도 모자라 또 걸어야 했다.
며칠전에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봉선화꽃을 넣었던 비닐봉투를 발견했다.
꽃잎과 잎이 뭉그러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있었다.
이번 여름을 이리 보냈다.
시들고 떨어지고 ??어가며 남은 여름을 보내고 있다.
끝일지 모르는 나를 보면서도
한가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낸 여름이였다.
끝은 시작을 의미한다.
끝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어 뭉드러진 봉선화꽃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올 여름도 함께 이십리터 쓰레기 봉투속에 버릴거다.
버릴건 과감하게 버리고,
아직 쓸만한 건 위생비닐봉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고
더 오래 두고 볼것은 냉동실에 보관하련다.
올 해는 손톱에 봉선화꽃물을 들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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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감으려 물을 흠뻑 묻혔는데 샴푸 넣어둔 병에 맹물만 조금 나왔습니다.
딸아이가 아침에 머리를 감으면서 병에 남아 있는 샴푸를 물을 부어 마저 썼나봅니다.
부엌엔 고무장갑이 떨어진지 오래입니다.
쌀이 떨어져 며칠전에 두 말 사면서 한 달을 먹을 수 있겠구나 했는데...
사소한 것들이 자꾸 돈을 쓰라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세수 비누로 머리를 감았습니다.
샴푸가 없으면 비누로 감으면 되고,
고무장갑이 없으면 맨손으로 설거지 하면 되고,
반찬이 없으면 냉장고 샅샅이 뒤지면 되고,
집이 없으면 친정으로 이사가면 되고,
남편이 없으면 혼자살면 되고....
뭐 안되는게 없습니다.
산다는 것조차 쉽게 돌려버리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빈 몸으로 태어나 빈 손으로 가는 게 세상이치라 돌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