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엔 대숲을 향해 장독대가 있다.
크고 작은 옹기들이 햇볕 잘 드는 뒤뜰에서 대숲을 사락사락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반들반들 윤을 내고 있다.
사촌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지난 봄날,
대숲에 숨으려고 뒤뜰로 내달려 장독대를 돌아가는 순간,
여자애는 뚜껑이 열려 있는 독을 보게 되었다.
쭉쭉쭉, 늘어서 있는 독 중에서 가장 큰 독이었다.
수묵 같은 묵은 장이 독 안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맑은 봄하늘이 장 속에 떠서 어룽대었다.
대숲으로 몸을 숨기려고 가던 여자애는 그만 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 속으로 숨어들면 누구도 자신을 못 찾을 것만 같았다.
여자애는 신발을 벗어 독 앞에 가지런히 놓은 다음에
독을 타고 묵은 장 속에 몸을 담갔다.
수묵같은 장이 철썩이며 여자애를 끌어 안았다.
여자애는 얼굴만 내민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사다리가 쑥, 내려올 것만 같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봄하늘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독 바깥에서 누군가 자신의 신발을 집어가는 소릴 들었다.
대숲에 봄바람이 일렁이는 소리도 사르락사르락 들렸다.
내가 너무 낯선 장소에 숨은 것일까.
누군가 독 바깥에서 신발을 집어 갈 때만 해도 혹시 독안을 들여다보고서
장 속에서 몸을 담근채 머리만 대롱 내밀고 ?瞞?있는 자신을 찾아 버릴까봐
염려 되더니 천지가 어두워지려는지 대숲 그림자가 장독대로 밀려오자
여자애는 와락 겁이 났다.
대숲에는 구렁이가 산다고 들었던 것이다.
한낮 대숲의 사락사락 소리는 밤이 되면 쉬익쉬익,
구렁이의 뒤척거림으로 바뀐다고 했다.
구렁이는 밤이면 대숲에서 쓰윽 내려와서 장독을 열고 간장을 들이 마신다고,
그래서 그렇게 검다고,
여자애는 그만 무서워져서 이제 독 바깥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장에 절여진 몸을 움직여볼 도리가 없었다.
종일 밭에서 파 모종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돌아온 외숙모가
장 항아리 뚜껑을 닫으려고 장독대에 나왔다가 여자애를 장 속에서 건져냈다.
종일 파밭에 앉아 있다 온 외숙모는 밤 내내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여자애가 들어갔던 장독만한 또 다른 빈 독에 가득 물을 채웠다.
간장에 절여진 여자애를 물독에 이틀을 담가놓았다.
그래도 여자애를 절여놓은 장냄새는 가시질 않았다.
외숙모는 여자애를 업고 나가 또랑의 흘러가는 찬물에 다시 하루를 담가 놓았다.
봄물이 여자애의 숨구멍마다마다로 흘러들었다.
너무나 추워서 여자애는 물고기나 되었으면, 했다.
그러면 장독에도 물독에도 또랑에도 갇히지 않고 흘러 갈 텐데.
외숙모가 담가놓는 대로 차가운 물속에 담가져 있었을 뿐
물고기가 되지 못한 여자애는
다시는 무엇이든 가득 찬 독에 속지 말아야지,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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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오래전 집을 떠날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