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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홀로 설 수 없는가


BY 이쁜꽃향 2003-05-24

대학 동기 중에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친구가 있다.
노처녀인 그녀가 결혼할 무렵,
시누이 남편이 보험회사 소장이었는데
순간적인 사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어 자금을 대 준
그녀의 시댁이 당연히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집도 날아가고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나 버린 그녀의 시댁으로 인해
결혼 초부터 부부간에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남편 봉급은 매달 시댁의 은행 빚 갚는 데로 모두 들어 가고
그들은 십 오륙년을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살고 있다.
연중 행사처럼 어쩌다 아이 때문에 가끔 만나는 그녀를 보며
남남처럼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지않을까 싶어
넌지시 물었었다.
'정말 세상 인심이 더러워서 이혼을 못하고 있어.
그래도 호적상에 남편이 있으니깐
혼자 살아도 누가 찝적대질 않지,
세상 인심이 얼마나 웃긴 줄 아니?
남편이란 사람이 내 집으로 왕래한 적이 없으니깐
혼자 사는 여자인 줄 알고 스토커처럼 괴롭히던 남자가
어느날 남편이 있다는 걸 알고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 거 있지...
내 참 기가 막혀서,,,
그 뿐인 줄 아니?
정말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할 때 여자 혼자 가 봐,
당장 무시하는 투로 주변의 시선이 바뀌게 돼'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놈 때문에도 이혼을 못하고 있다는 그녀는
아주 다재다능하고 유능한,
그리고 세상 이치에 매우 밝은 학교 선생이다.
도 대표 운동 선수로 활약했던 젊은 날의 실력으로
각 학교 대항 배구 대회 때마다 핵심 멤버로서
그녀의 학교에 우승을 안겨 주는 야무지고 다부진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도 세상의 이목과 체면 등을 이유로
자신의 길을 똑 부러지게 결정하지 못 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여자인 모양이라고 웃고 말았다.

여자가 홀로 서기엔 세상 인심이 너무 야박하다,
그러니 허수아비일지라도 남편이 있어야 한다고 얘길 하던
인생 선배들의 경험에서 우러 난 조언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젠 나도 경험으로 알 게 돼버렸다.

7주 전인가 유치원에서 아이들끼리 밀치다 한 아이가 이마를 다쳤다.
다른 데도 아니고 이마인지라
담임은 즉시 병원으로 옮겨 CT촬영에 MRI촬영을 하고
검사 결과를 지켜 보기 위해 입원을 시켰다.
담당 주치의는 '아이들이 흔히 다치는 케이스로
방바닥에만 넘어져도 이렇게 된다.
일주일 정도 약물 치료하면 걱정없다'는 데에도
젊은 부모는 난리를 해댔다.
입원실도 일인실을 쓰겠다는데
병실이 없어 이인실을 쓰게되니까 불평,
의사가 아무리 만류를 해도
앰블런스를 불러 삼성의료원으로 가서 입원하겠다고 떼를 썼다.
주치의는 '이건 병도 아니다.
이걸로 서울로 가면 병 취급도 못 받고 욕 먹는다.
차라리 그 경비로 애 옷 하나 더 사 입히고
소고기 사다 해 먹여라'고 수차례 나무랬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그냥 도내의 대학병원을 알선해 달래서
앰브런스로 보냈더니 그 의사도 검사 해 보고 다시 내려 보냈다.
그런 환자는 대학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며.
담임과 동료 직원들이 매일 위문을 가고
검사결과 후유증조차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나와
2주만에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뜻밖에도 부모는 '합의금'과
먼 훗날에 있을 지 모를 후유증에 대한 공증을 해 달라고 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웃으며 알았다고 답하고 나왔다.
오죽 아이가 염려 되었으면 젊은 사람이 저러랴 싶은 마음에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만일 후유증이 있다면
그 치료비 좀 못 대주랴하는 심정에서
공증도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회의에서 전 직원이 반대를 한다.
보호자의 행동이 너무 악의적이니 또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변의 조언들이 아무래도 나 혼자 결정해선 안될 거 같아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일 다 저질러 놓고서...'
'사회의 잘못 된 부분을 찾아 내 바로 세워야 할 사람이
암암리에 적당히 해 버리려 하다니 그게 뭐냐,
차라리 알려서 정당하게 일처리를 해라'

결국 남편이 나서게 되었다.
금방 공짜 돈을 챙길 줄 알았던 저들은
'왜 남편이 중간에 나서는 거냐'며 온갖 공갈을 해 댔다.
다행히 금년 초,
상해보험도 '음식물(식중독) 배상 '부분까지 가입했었다.
보험사에서는 나더러 신경 쓰지 마라 한다.
일억 배상 보험이니
나중의 후유장애까지도 모두 보장되고
치료비며 기타 등등을 자신들이 알아서 할테니 염려 말랜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입원한 아이와 돌보는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랴 싶어
성심껏 잘 해 주면 그 쪽도 달라지겠지 싶어
묵묵히 원하는대로 해 주려 했는데
해 주면 해 줄수록 가관이다.

내가 그렇게 물러 보이는 걸까,
아니면 너무 부유해 보이는 걸까...
'합의금'을 빌미 삼아 별 협박 공갈을 담임을 통해 해 오더니
뭐 진정서를 제출하고 고소까지 했대나...
변호사 사무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하고 설쳐대더니
이 쪽에서 묵묵부답이니 한 이주간 조용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위협적으로 나가면 겁 먹고
자신들의 뜻대로 모두 해줄 줄 알았던가 보다.
이 지역에서 남편 이름 석자면 웬만한 일은 거의 해결 되겠지만
그렇게 하기 싫어 그냥 원만히 해 보려 했는데...
되도록이면 조용히 우아하게 내 힘으로만 해 보려 했는데
별 유치한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게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멀쩡한 아이를 병원에 잡아 두고 고생을 시키는
아직 젊디 젊은 그 부모가 정말 한심스러웠다.

이젠 이미지 관리할 때가 아니란 결론을 내리고
냉정하게 처리하기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원무국장과 그 병원 원장이 모두 내가 잘 아는 이들이지만
끝까지 직접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병원 측에 사실을 알리고 유감의 뜻을 전했다.
깜짝 놀라 '그럼 진작 말을 해 주지 그랬느냐...'란다.
말 안 하면 멀쩡한 아이를 몇 달이고 놔 둘 심산이었을까?
의료보험 혜택도 안 된다는데
일주일 입원 정도면 끝난다는 상처를 시일을 끓어
병원을 세 군데나 옮겨 다니고 검사하다 보니
입원 치료비가 육백만원 이상이나 될 거 같다.
끝까지 가 보겠다며 갖은 오기를 다 부리더니
보험사와 병원의 압력 때문인지 드디어 엊그제 퇴원을 했단다.
설흔 한살 밖에 안 된 사람들이
세상을 다 산 사람들처럼
어떻게 그렇게 악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내 생전에 처음 당하는 어이없는 일인지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게 사악한 인간들 또한 생전 처음 겪었으니...
'아니, 그렇게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이
그?? 일 가지고 뭔 신경을 써?'
고민하는 날 보며 주위에서는 이구동성으로 핀잔을 주었다.
'여자가 아무리 똑똑해도
남자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 또 따로 있나 봐.
세상 인심이 모두 그렇다니깐.
여자 혼자 일을 보면 우습게 알아...'
'그러니 아무리 못났어도 남편이 있어야 한다잖아...'

그럼 홀로 서는 여자들은 어찌 살라고?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홀로 설 수 있다고 큰 소리 쳤었는데...
정말 그럴 자신이 있었는데...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공부를 한 달 가량 확실하게 배워 버렸다.
몰랐어도 될 세상 인심을 직접 겪고 보니
아무리 좋은 경험 했다고는 하지만
웬지 뒷 맛이 씁쓸하다...
이놈의 세상이 여자를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앞으론 두 번 다시
'인정'에 치우쳐 고초를 당하는 일은 하진 않겠지만
'여자'라고 무시하는 일도 결코 간과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