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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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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이 일주기(一週記) - 1


BY 이강민 2000-10-11

옛 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뛰는 일이다.

그것이 1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삶에 젖어 나를 잊어갈 때 쯤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봉남이는 그랬나 보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 왔다갔다...보는 사람이 불안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미경이라 했다. 386세대에게는 그 전의 순자, 미자만큼이나 평범한 이름이겠지만 봉남이에게는 지극스러운 이름이었던 듯하다.

하루종일 일도 안하고 다리를 떨며 칸막이의 회색벽을 하염없이 쳐다보고는 하였다.

퇴근하는 봉남이 책상에 가 보았다.
이런 놈 하루종일 미경이,미경이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 마지못해 연습장에 빽빽히 적어 내던 숙제보다 더 정성스레 쓰고 또 쓰고 하였던 모양이다.

회요일 아침에 봉남이는 10시가 훨씬 넘어 출근하였다.

부장에게 일장 연설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로 돌아온 놈의 얼굴에는 잠을 못 잤는 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입가에는 못참겠다는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술 좋아하던 놈이 어제는 그냥 갔던 기억이 새로웠다.

점심이 가까워 오자 봉남은 나의 팔을 끌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못살겠다는 듯한 놈의 표정을 무시할 수 없다. 원하는 대로 해주면 점심밥은 물론이고 저녁에 술 한잔이 그냥 생길 일이다.

봉남은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기분을 마음껏 발산했다.

다행히 나의 대답을 원하는 것 보다 그냥 누군가에게 자기의 흥분을 풀어내어 좀더 그 기분을 증폭시켜 즐기고자 하는 목적이었기에 밥을 먹는 데 방해는 되지 않았다.

순대국은 ?ダ羚駭?

중3때 전학을 와 종로 사직 도서관 기둥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던 일...3년을 내리 기둥 뒤에 숨어서 책을 읽는 그녀를 짝사랑 하였던 일...몰래 ?아 갔다가 그녀의 오빠와 친구들에게 들켜 도망했던 일...중학교 여학생을 꼬셔 여학생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받던 일...그나마 점심시간이 1시까지인게 내겐 다행이었다.

점심에 못다한 얘기는 저녁에도 해야 하고...술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봉남이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나를 나꿔채서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맥주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주변의 눈이 걸렸던 모양이다.

고교 3학년 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딱 한 번 말을 해 보았던 것을 끝으로 그녀와의 인연은 끝난 것으로 알았다는 것과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가 졸업 한 여학교 출신 여직원을 꼬셔 졸업앨범에 기재된 집을 3개월을 맴돌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결국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지만 이미 그녀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그의 이야기는 정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봉남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 눈이 커졌다.
고교 졸업이면 82년. 지금? 2000년.
무려 19년이 흘렀는 데 그게 도데체 가능한 이야기냐?

봉남이는 의기양양해지다 못해 으쓱해져 있었다.

마구 마구 날아오르려는 봉남이를 진정시키고 맥주한잔을 마셨다.

어디 살던?
미서동에.
내가 사는 동네네. 결혼 했겠는 걸...
몰라.
몰라? 왜 몰라?

봉남이는 다시 그녀와의 일방적인 옛 기억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신 술로 인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봉남은 굳이 나를 먼저 보내고 멀어져 가는 차창 뒤에서 입이 귀까지 걸린 얼굴로 손을 흔들 뿐이었다.

오늘 놈은 잘 자겠다.
속에 혼자 감당하기 힘든 자랑을 다 들어 줬으니...아마도 나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하늘로 날아 집에 갔을 지도 모른다.

---수요일, 목요일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