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셨지만 큰아버지 내외분이
일찍 돌아 가시는 바람에
우리 어머니는 4대 봉제사에 두분의 제사 그리고 명절제사까지
일년에 12번씩 제사를 지내야 만하셨다.
언젠가 호열자가 유행을 해서 그해에 한꺼번에 많이 돌아 가시는
통에 여름이면 하루 걸려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위로 딸만 셋을 내리 낳으시고 또 큰집의 조카들까지 거두셔야 했던
어머니는 우리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감당을 할수가 없었으므로 야단을 칠때는 무섭게 굴었기 때문에
어릴때 나는 우리 어머니가 계모가 아닐까 생각했던적도 많았다.
한번은 추석날이었는데 우리 세자매가 갑사로 만든 똑같은
색동 저고리를 입은체로 써커스 구경을 갔는데 비가 온데다가
짐작 보다 늦게 끝난 관계로 집에 들어 오는 시간이 아주 늦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색동저고리는 비에 젖어 버렸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야단 맞을까봐 신고있던 고무신을 멀리 차서
신이 바로 놓여지면 야단을 안맞고 꺼꾸로 놓이면 야단을 맞는다는
신발점을 치기도 하고 대문간에서 부엌으로 살금살금 들어 가서
식칼을 가져다가 대문간 안에다 꽂히게 던져 보았는데(식칼이 제대로
꽂혀야만 야단을 맞지 않는다) 흙에 제대로 꽂히지 않고
픽 쓰러지는 바람에 우리는 야단을 엄청나게 맞고 셋이서 안방에
꿇어 앉아서 손을 들고 벌을 서야만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식칼점이 신통하게 맞은것이다.히힛!
이런 어머니이시다 보니 어머니가 뭘하라고 지시를 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우리들에게 맞겨지는 임무는 바로 콩나물 다듬기였다.
열살무렵의 우리들 손이래야 아주 작아서 어른들처럼 콩나물을
한움큼씩 쥐고 빠르게 일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라 콩나물을 하나 들고
꼬리를 떼고 콩깍지를 제거하고 하다 보면 이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 어린 우리들로서는 고역이 아닐수 없었다.
허리를 비틀고 기회만 있으면 다른 놀이를 하다가 어머니가 쳐다보면
다시 다듬고 하니까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렸는데 나중에는 콩나물이
시들시들 말라서 물을 축여 가며 다듬기도 했다.
어릴때의 내 생각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고 힘든일이 콩나물
다듬기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모양인데
이제 내가 반찬을 결정하고 손질을 할수있는 선택권이 생기자
나는 우리집 식탁에서 콩나물을 아예 빼버렸다.
물론 콩나물을 다듬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콩나물로
연상되는 그 싫었던 순간까지도 떠 올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체구에 많은 식구들을 건사하고 그 많은
제사를 모셔야 했으니 그 무렵 어머니의 일상이 얼마나 힘드셨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우리끼리 싸우기라도 하면 빗자루 몽뎅이를 꺼꾸로 들고 ?아
오시던 어머니,
일하는 언니가 있었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집청소를 담당하는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어머니의 검열을 받곤했는데
게으름을 부리고 제대로 해 놓지 않고는 학교도 가지 못했다.
열여덟에 시집오셔서 나하곤 딱 스무살의 차이가 나는데
내가 열살이라 해 봐야 어머니는 서른살이었을테니
제사에 파묻혀 질식 당한 젊음이었지 않나 싶다.
그래도 그렇게 당찬 어머니가 계셔서 부모 없는 조카들도 시집 장가
들이고 우리 육남매를 대학까지 다 보낼수 있었을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콩나물 반찬을 해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