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이 많았던 청년시절에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계절에 걸 맞는 계획을
곧잘 세우곤 하였다.
봄이 오면 새로운 마음으로 심기일전하여 학업에 충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여름이면
기억에 남을 무전여행을, 가을이면 풍경을 벗삼아 대대손손 길이 빛날 명작을 그리고
싶었으며, 겨울이 되면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긴긴 동지섣달을 지샜다.
이렇듯 대부분의 계획과 상상은 실효성 없는 것들이었지만 도중에 포기하더라도 무모한
용기로 분전은 했었다.
무모한 용기가 아름다웠던 시절, 돌이켜보면 나의 청춘시절은 내 안에 감정의 기복이 좀
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어떠한 계획조차 세우지 않는다.
특별한 계획까지 세워서 할 일도 없을뿐더러 설사 계획을 세울만한 일이 있다하여도
머리 속에서 대충 생각해보고 실행에 옮길 뿐이다.
내가 이러는 것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더라도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는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도 느끼는 감정은 사철 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를 지났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예민하고 순수했던 예전에 감정들이 무딜 대로 무디어져 어쩌다 문득
생기는 감정들마저 사치스럽게 느낄 정도다.
이런 나에게도 오늘은 특별한 날인가 보다.
새로 추진한 일이 있어 거래처 사람과 상담을 하고 사무실로 귀가하던 중 소낙비를 만났다.
시내 교통이 복잡할 것 같아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탔는데 충무로역에 내리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무실에 두고 온 우산이 간절히 생각났다.
지하철을 오가는 통로에서 한참 동안 서성였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비를 맞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늘로 향해 반쯤 열려진 유리창에 세찬 소나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소나기인지, 가는 여름의 마지막 발악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초가을을 맞이하면서 나는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어릴 적, 해가 쨍쨍 내리쬐는 오후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원두막을 향해
달렸던 기억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서 질주하던 친구의 뒷모습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곁에 다가와 우산을 같이 쓰자던 같은 반 여자 친구, 인생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가 그리워지고, 내게 사랑이 뭔지를 알게 해 주었던 첫사랑의 여인도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의 얼굴도 가슴 저리게 스쳐갔다.
소낙비가 내리는 가을은 내게 어떤 계획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였으며 나와 온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무미 건조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오늘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준 특별한 날이었다.
인연의 글방으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