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부터 시작 해야할까?
지난 99년의 기억은 내 유년의 그것 보다 더 아득하고 희미해서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매일 기억 하고 살았음 견딜수 없는 시간이므로 살기위해 작위적으로 망각의 시간을 건넜던 것일까.
그리움에 미치게 목이 마를때 마다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지하3층시절로 들어서면 매혈의 수치가 몸을 엄습하고,
자식잃은 슬픔을 팔아 무얼 얻고자하나 나 자신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다 잠들곤했다.
오늘 술기운을 빌어 젖어 찢어지지않는 활자 앞에서 다시한번 시도한다.
그러지 않고는 내인생을 저당잡은 협잡꾼들이 내게 강요하는대로,
난 그냥 평범한 주부, 남매의 엄마 ,한집안의 며느리란 이름으로 남겨질테니까!
희미해진 기억은 언젠가 삭제되어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도 어디서 본 영화 내용일까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
아버지와 교차해 내게로온 아이 .
아버지의 이름자를 따고 제 언니들의 이름자를 따서 승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손주들의 이름을 늘 시장통 같은 집에서 짓던 시어머니는 모든 자신의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탓에 이미 지어진 이름을 들고가 한자를 받아왔다.
해돋을 승에 어질현.
하지만 이름보단 아가로 불리웠다.
제속으로 난 자식도 같지 않음을 알았다.유독 시숙만 편애하던 시모의 맘을 이해할것 같았다.
유독 부모맘을 녹이는 자식이 부모맘에 못 밖는다는 어른들 말씀이 늘 거슬렸다.
힘든 세월을 견딜수 있게 했던 힘 .
양파링 선전에 발을 까닭이고, 순풍산부인과 노래만 나오면 어설픈 발음 으로 따라하던 우리아기.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 미쳤다며 내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다며 심히 대했다.
동탄으로 내려가면서 부터는 차로 30분 거리인데도 술자리를 핑계로 일주일에 두세번 집에 올까 말까.
오히려 그가 없는 밤 난 안식을 느끼며 잠들수 있었다.
내겐 연인같고 전부인 것 같았다.
잠시 외출을 해도 보고싶고....
나의 과도한 편애와 나에대한 남편의증오가 아이에대한 애정표현조차 빼앗아가 버렸다.
아이가 운다고 -단한번 뿐이었으며 병에의한 통증 때문이었는데-이불을 뒤집어 씌우는 그에게서 내 마음도 달아나고 있었다.
섬집아기를 불러주면 잠들다가도 끝부분은 못하게 하던아가.
"아기는 혼자남아......어느새 스르르르 ......"
제 운명을 알고 있기나 했던것 처럼.
답답한 마음에 철학관이라는 곳을 찾아 간 적이 있었는데 ,대뜸 화를 내며 아기 이름이 나쁘다고 했다.
여름에 낳은 아이를 해돋을 승자를 써서 머리에 열을 받는다고 큰 신뢰를 갖고 찾아간건 아니었지만 신생아때 태열과 땀띠로 온통 머리가 뒤덮혀 애먹은 일이 있어서 새로 이름을 받아 왔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의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란 이유로 남편이 거부했다.한자 만이라도 바꿔주자는 부탁에 냉소 어린 웃음을 띄우며 드디어 미쳤다고 했다.
그당시 끈임없이 불길한 꿈을 꾸곤 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이를 갈다가 이가 부서져 온 입안에 석회가루 같이 가득차 잠에서 깨곤 했다.
치통때문이거나 심하게 목이 말라서 였다고 생각했는데....
모든게 끝없이 이별을 암시하고 있었는데도 난 일신의 불행만을 아파하며 최소한의 엄마노릇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99년이 밝아 왔다.
이제서로 보듬으며 내가 조금 양보하고 살겠다고 남편을 끌어들이고,
실낱같은 혈육의 연은 모두 끊어 버렸다.
나는 출가 외인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엄마는 호적을 정리하시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 조카에게 얹힌 기이한 호적을 만드셨다.
호주제 라는 것이 그런 우스운 것이 있었구나.
엄만 그저 껄껄 웃으셨다.
30년을 키워온 수족같은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이제 그 인연의 줄마저 끊어내고 웃고 있는 엄마가 애처로웠다.
지난해 아버지에 이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큰언니와도 일체 여락을 끊었다.
미워하거나 원망해서가 아니라 서로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인연도 있었으므로.....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고 다시한번 일어서려고 할때 또 임신을 했다.
남편의 마음을 끌어 본다는 것이 또 계획없는 아이를 얻은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지만 운명처럼 느껴져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들을 기다리던 시댁 어른들도 남편 조차도 이번엔 느낌이 다르다며 좋아라 했다.
처음으로 입덧한다고 음식도 얻어 먹고,친정과 집짓던일로 쌓였던 앙금까지 씻기는듯해 이젠 행복에 언저리에 들어 섰나 안도 했다.
형편이 어려워 아는 오빠의 병원까지 다니곤 했는데, 초음파를 보고는 딸이라고 했다.
조금 섭섭하고 멍한 기분이 들어 시내를 돌라 다니다 집으로 돌아 왔다. 날때까지 비밀로 할것인다.
새생명에 대한 모욕인거 같아 딸셋은 어떻겠냐며 남편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편이 낳자고 했다.
너무 고마워서 재잘거리며 그동안 나한테 못한거 다 용서해 주겠노라고 나 잘키우며 행복할자신있다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시누이를 통해 시어머니에게도 말이 흘러 들어갔던것 같다.
어머니의 강요로 두번이나 유산을 했던 우리 형님.
그래도 내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느날 남편이 들어와 병원에 가자고 했다.
딸셋은 죽어도 못키운다고...
역겨움이 확 밀려 왔다.
울어도 보고 회유도 해봤지만 남편은 확고 부동했다.
이미 늦어 수술하면 나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좋으냐고 물었다.
앵무새처럼 딸셋은 죽어도 못키운단다.
엄마 말이 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남자의 아이는 나도 더이상 낳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리라.
꼭 헤어지리라.
다 갚아 주리라 악에 바쳐 수술대에 올랐다.
당장은 이혼을 할 수 없었다.
홀로 서기를 위해 직업훈련을 받으러 다녔고 남편은 그냥 손님처럼 그렇게 가끔 집에 다녀 갔다.
그때 난 더이상 불행은 없다고 생각했다.
악에 바쳐 불행아 남았으면 덤벼라.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까먹고 있었다.
면허를 따고 미루었던 치과 치료를 받고 일을 배우고.....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우는아이를 떼어놓으며 되뇌였다.
다 너를 위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