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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수만 있다면...


BY 잡초 2003-04-02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남편의 등뒤로 따사로운 봄 햇살이 살풋 비춰지는듯도 싶다.
무심코 바라본 배란다에선 매실꽃이 눈처럼 비처럼 흩뿌리고
벌떼들은 윙윙~ 꽃밭을 노니느라 눈앞에 어리럼증을 유발시킨다.

어느새 봄이었던가?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있었던가?

들며나며 남편은 그렇게 조금씩 나와 아이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설을쇠고 바로 이튿날부터
하룻밤씩...혹은 이틀밤씩을 남편은 손님처럼... 하숙생처럼
그렇게 간간히 머물다가는 훌쩍 사라지기를 몇번.

돌아와 머물다가도 한밤중이고 신 새벽이고 홀연히 사라지기도 수차례.
때론 남편의 혀끝으로
내게 가시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도 꽃아놓고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도록 심장을 멈추어도 놓았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만 내 가슴을 쓸어내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할수만 있다면 내 심장을 꺼내어 바라보고도 싶다.
모양만...형체만 당그마니 남아 속의 내용물은 아마도 흐믈흐믈
그렇게... 녹아 없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나브로 들고나고 하던 사람이
조롱하듯 비웃듯...
옷가지들을 싸고 풀고 하던 사람이.

며칠전
들고 나갔던 옷 가지들을 택시안 손잡이에 전시품처럼 걸어놓고
우적우적... 내가 차려놓은 아침상을 손을통해 입속으로 밀어넣는다.

자동차 문을 따고
옷가지들을 보듬는데 휘청~ 내 팔이 후들거린다.
오랜안면이 있는 동네 아저씨한분이 작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디 이사라도 갔다오냐며 웃는 입으로 묻는다.
" 아니요... 세탁소에서 한꺼번에 찾아오는 거예요 "
황망히 나는 대답을 하고 불에덴듯한 빠른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등뒤에 꽃히는 그 아저씨의 시선이 왜그리도 따갑고 부끄럽게 느껴지던지...

남편과 내가 함께 잠을 자던 그방에
남편의 짐들을 팽개치듯 놓아두고 서둘러 난 그방문을 닫아버렸다.
남편의 그 옷가지들엔
내 눈물과 한숨과 분노와 자존심이 모두 담겨있을거 같기에...

먹고난 밥상에서 대충 반찬그릇들만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난 종종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다시 퇴근을 하고...
다시 아침을 맞고....
달라진것도 없이 변한것도 없이 우린 그렇게 시간들을 맞고 있다.
다만 달라진것이라곤...
사라져버린 대화로 인해 괴기스러울정도로 조용하다는것.
다만 변한것은 웃음을 잃은 가족모두가 터미네이터처럼... 안면근육이 굳어있다는것.

나가는 그 걸음도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돌아오는 그 걸음역시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겠고
보낼때 담담히 보내지 못했듯...
다시 맞이하는 내 마음역시도 편편치만은 않으리라.

아직은...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짙은 안개속같은 내 인생에 아무런 실마리조차 보이지를 않고
언제쯤 저 지독한 안개가 걷힐지 예측또한 할수가 없는지라
그저 무심히
마치 타인의 삶처럼 그렇게 관망만을 할뿐.

할수만 있다면...
거꾸로 시간을 돌려놓고 싶고
할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몽땅 그 시간들을 지워버리고 싶을뿐이다.
그렇게 몸안의 어느 혹하나쯤 떼어내듯...
과감히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수술이라도 하고 싶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