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보일러도 들어 오지 않는 낡은 초가집
사과 궤짝 찬장을 겨우 면한 부엌에 '한국 도자기' 그릇세트가
배달 되어 오던 날,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모 실업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돈을 벌러 열 여섯살에
부산으로 떠난 언니는 우편환이 든 등기 우편을 가끔
보내오긴 했지만, 다른 집 딸들에 비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가끔 명절 날 내려 올 땐, 가족들 선물은 고사하고
배삯을 겨우 마련해 오는 것 같았다.
생활비와 학비를 빼고 남은 뻔한 언니의 몇십개월의 월급을
저당잡히고 장만했을 하얀 백자에 청색 꽃이 박힌 그릇들은
지금도 꽤 값이 나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을음 가득찬 흙 부엌에서 그릇에 어울리는 요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결국 어머니는 궁색한 주머니를 털어 그릇을 놓기 위해
그릇장을 사고, 마루 끝에 놓이게 되었지만,
초라한 밥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결혼보다 아이를 먼저 낳고 산 나는 이십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 비슷한 그릇세트도 가져보지 못했다.
시어머니,시이모 ,남편이랑 둘이 살 때 쓰던 그릇들을 모아 놓은
씽크대 한켠 그릇장은 색과 모양도 다양하다.
매일 식구들 밥상을 차릴땐 상관 없지만,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엔 적절한 그릇을 찾을 수 없어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래도 담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그릇은 다른 것 같다.
음식의 맛과 모양에 맞는 잘 갖춰진 그릇들은 자리의 격을
갖추게 한다.
사람도 그릇처럼 제 쓰임이라는게 있는 것 같다.
학부모 총회가 있어 아침에 학교에 가니,
학급 대표를 선출하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추천하고, 미루다 나까지 거론 된다.
일은 어쩌면 핑계고, 나는 짱의 그릇이 아님을 알기에 극구
마다했다.
어떤 조직이나 대표가 있고 이를 믿고 받쳐주는 허리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나는 허리의 역할이 제격이다.
지난 3년간 학부모회 임원을 하면서, 내가 속한 반은 뛰어난 결집력을 보였고,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는 관계가 되었다.
대표를 맡은 사람도 잘 했지만,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보좌 역이
제격인 사람들이 많아 허리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대학 3학년때 과 학생회장을 한 적 있는데 그 때
내가 느낀게 있다면, 지도자만 앞선 조직은 부실하다는 것이다.
특히 말 많은 동네 아줌마 조직은 더 그렇다.
밑에서 이죽거리고, 비아냥거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걸 막아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데,
그게 바로 내가 해야할 일이다.
나는 멋진 주요리가 담긴 깔끔한 그릇이 아니라
소박한 김치 보시기처럼 부담없지만 꼭 필요한 그릇이다.
김치 보시기엔 김치가 담긴게 어울리고,
뚝배기엔 진한 국물이 끓고 있어야하고,
간장종지엔 간장이 담겨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