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다 보니 내 뜻과는 다른 모임들이 생긴다.
남편과 나 둘 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
자연히 부부동반 모임도 여럿 생기게 됐다.
그 가운데 어느 모임은
이 지역의 이름 석 자만 대면 누구나 알아 보는
유명 인사(?)들로만 구성 되어 있는 모임도 있다.
난 그 모임에 가는 걸 아주 싫어 했다.
남편은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따졌다.
그 모임은 남편들의 유명세에 따라
동반한 부인들의 품위도 덩달아 높아보이는
그런 느낌을 주는 아주 심리적으로 불편을 주는그런 류였다.
의학박사, 교수는 기본이고
최하위가 자영업자, 일명 '사장'이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만 해도 일개 회사원이었던 남편의 위치는
시샛말로 쪽팔리는 자리였달까.
동반한 부인들도 육십대 넘은 여인들로 부터
이십대의 젊은 이들까지 각양각색.
난 딱 그 중간역이다.
아직 젊지도 늙지도 않은
기로에 선 사십대 중년 아낙.
아무리 젊은 ,
아니 차라리 어리다고 표현해야 할 부인도
남편이 잘 나가는 회계사니 건축사이다 보니
저절로 그 위상이 높아지는 거 같았다.
명품으로 귀금속으로 치장한 부인들.
첫 대면에 의상으로 바싹 기가 죽었다.
모두들 이미 전부터 아는 사이인지라
서로 친근한 인사를 주고 받는데
나만 꿔다 논 보릿자루 마냥 엉거주춤...
나 혼자만 떼어 놓고 보면
나도 이 지역 사회에서 정말 유능한 캐리어 우먼 중의 하나인데...
(대학 강사에 직장 장이면 꽤 괜찮지 않나...?^^)
아무튼 호화로운 호텔 뷔페에서 치뤄 진 첫 만남 내내
불편한 심기로 먹는 게 모두 체할 뻔 했다.
그 당시엔 부인들의 화제 또한 사업 얘기며 값비싼 의상,
귀금속 등 신변잡기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부턴 이 핑계 저핑계로 그 모임에 참석칠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덜컥 그 모임의 총무가 되었다.
모두들 원로들이다 보니 이제 남편 차례가 된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임원진은 부부동반이 의무라며
참여하길 종용하는 남편 땜에 마지못해 따라 갔다.
머릿 속엔 또 그 불편을 어찌 감수해야 하나 온통 그 생각 뿐인데...
의외로 많은 부인들이 불참한 광경에 난 의아했다.
그럼 그렇지, 모든 건 인지상정이겠지.
분명 나처럼 그 분위기가 싫었던 여인들이 많았음이야...
숫자도 많지 않은데
서로 누가 더 잘 나고 못할 것도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좀 숨통이 트인 느낌이다.
자연히 이야기는 자녀들에 관한 것으로 흘렀다.
난 젊은 축에 끼일 판이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째서 애들이라면 앓아 누웠다가도 힘이 나는가 몰라.
아마 남편이 해 달랬으면
내 몸 아프다고 절대 안 움직였을거야.
애들이 온다니깐 벌떡 일어나서 시장 갔지 뭐야.
좋아 한다는 거 바리바리 사 와서 장만하느라
하루종일 앉을 새가 없었는 데에도
글쎄 아픈 것도 다 나은 거 같더라니깐.
자식들을 위해서는 아마도 없는 기가 나오는 가 봐'"
육십대 노장 부인의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가 새로 만들어지는 거 같다는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예전에 선배들이 남편보다 애들에게 애정이 더 간다며
애들 보고 산다라고 했을 땐,
삼십대의 젊은 엄마로서는 솔직히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부부간의 애정으로 살아야 할텐데 아이들 때문에 산다는 건
얼마나 비참한 생일까라고까지 여겨 지고,
어쩌면 그녀들의 삶은 실패한 삶-남편과의 애정에 있어-
이라고까지 추측해 버렸었다.
애들은 애들 인생이고
나는 남편과 더불어서 두 사람이 하나의 행복을 만들어 가야만
진정한 행복한 생이라고 나름대로의 행복관을 가지던 터라
그녀들의 얘기에 피식 웃고 말았었다.
'그~래요? 아이들을 보고 산다구요?
그건 좀 어쩐지 불행한 인생같지 않나요?'라며.
그런데 시간이 흘러 내가 그 선배 나이가 되고 보니
내 섣부른 그 때의 추측들이 얼마나 경솔했었나 반성하게 된다.
지금은 나 역시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만사를 젖혀 두고 덤비게 되니 말이다.
아이가 원하면 난 즉석 리모컨이 되고 만다.
입으로는,
'엄마 피곤하니 네가 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
'엄만 역시 외할머니랑 똑 같애.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시잖아.'라며 애교스럽게 껴앉는 아들넘.
그리고 언제부턴가 남편에겐 점점 소홀해지기 시작한 거 같다.
큰 아들넘에겐 더 심했다.
사과를 좋아하는 그녀석에게
부르지 않아도 늘 사과 접시를 대령하는데
남편이 또 뭐라 할까 봐 두 접시를 준비한다.
그런데도 어느새 곁눈질로 넘겨 다 본 남편 왈,
'왜 저 넘 것은 좋은 델 주고 난 찌꺼기냐'란다.
자세히 보니 정말 그런 거 같다.
남편은 큰 아들을 엄청 스파르타식으로 다뤘었다.
난 반사적으로 고녀석을 더 챙기게 되니
부자간의 사이는 점점 더 소원해지기만 하고...
대학생이 되고 군에 가게 되니
이제야 좀 달라진 거 같긴 하지만...
요즘은 나도 예전의 그 선배 여인들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화이트데이라고 꽃 한송이도 안 챙겨 오는
이젠 무드깡이 되어버린 남편보다는
엄마 생일마다 기념일마다
남편보다 앞 서 챙겨 주는 아들넘들이 더 좋으니 어쩌란 말인가...
이제는 정말 아이들 보고 산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거 겉은 중년 아지매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점점 아들녀석과의 사랑에만 빠져들게 되고...
남편은 외로운지 이따금 넋두리를 한다.
'마누라가 건강도 안 챙겨 주니 스스로 해야지 뭐...'
(난 아들들 보약은 철마다 해 주고
남편은 애주가, 애연가라서 안 해 준다.)
할머니들은 '그래도 영감이 최고여~.
자식들 아무 소용 없어~'라며 고갤 저으시는데,
글쎄, 부모는 자식에게 대가를 바라고 희생하진 않는 법.
내 자식에게 뭐든 해 줄 수 있는 자체가 즐겁기만 한데,
아직까지는 자식보다 남편이 더 소중함을
절실히 못 느끼겠는 걸 어쩌랴...
그래서 오늘도 난 방황을 한다.
남편과 아들.
그들 사이에서 어느쪽에 애정을 더 두어야 하나...
지금 현실은 아이들이 더 좋고
늙어서는 영감이 필요하긴 할 거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기분 내키는데로 그 때 그 때 닥치는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