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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봉사하는 남편


BY 이쁜꽃향 2003-03-07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식탁 앞에 서 있는 날 안방에서 남편이 급히 부른다.
또 무슨 뉴스거리가 있길래...

연령이 많단 이유로 고교 입학을 거부 당한 장애인을 위해
남편이 '인권위원회'인가 하는 곳에
이의 신청을 했다는 얘길 엊그제 들은 터라
결과가 내심 궁금했었다.

결과는 남편의 의도대로 해결되는 모양이다.
언론의 촛점이 맞춰졌으니
아마도 도교육위원회나
특수교육 분과는 지금쯤 발칵 뒤집혔으리라 여겨진다.

언젠가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남편 사진을 보고
아들녀석 학원 강사가
'너네 아빠 장애인이시니?'하더란다.

남편은 이 땅 위의 누구나가 어떤 경우에도 차별받지 않고
공평한 대우를 받고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이 지구상에서 없애야한다며 발 벗고 나서서
장애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뛰는 사람이다.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그 일 하면 수입이 얼마나 되?'라던가
무언가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일인가 궁금해 한다.

말 그대로 '돈 한 푼 안 생기고
내 시간 들이고 내 돈 들여 봉사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인데
그는 아주 신바람이 난 사람 같다.

우리집엔 양가 모두 털어 봐도
장애인은 한 명도 없다.
내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집 살림이 넉넉하여 남을 위하여 기부하며 살 상황도 아닌 지금
당장 내 집 일이 걱정인 판국에 웃으며 밀어 줄 마음이
전혀 생기질않는다.
그럴 시간 있으면 아들 녀석 숙제라도 한 번 봐 주던가
바쁜 마누라 대신 집안 일을 좀 해 주던가,
생각할수록 오히려 미운 생각이 더 해 간다.
'장애인을 위하는 일 보다도
내 집 일이 더 급해.
가정에다 그 정성 좀 쏟아 봐'라며 불평을 했지만
하던지 말던지 그는 밀고 나갔다.

해마다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 없애기 운동을 해 나가느라
때로는 내 학생들까지 동원하게 하고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의 마인드가 안 서 있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시민들의 의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느냐'며
예비 사회복지사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그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걸 지켜보는 가족의 한사람으로서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돈 많은 부자들도 나 몰라라하는 판국에
자기가 무슨 부처님, 예수님 심부름 꾼이라도 되는가.
벌써 사오년째 계속되는 그의 봉사활동에
이젠 반박할 기력조차 생기질 않는다.

물론 이 사회 어느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긴 하다.
장애인도 이 나라에서 동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함은
나도 충분히 인정하는 터다.
하지만 굳이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국가나 지역사회 단체장이 어련히 알아서 해 나갈까...
없는 살림에 나 몰래 상당한 기부를 하고 있을 거란 걸
익히 짐작하고 있는 터에
이젠 아예 '장애인 권익문제 연구소'까지 마련을 했댄다.
장애인이 휠체어로 맘껏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구도 경사로로 만들고,
장애인 전용 화장실도 만드느라 비 싼 경비 들여 가며.
그 사무실 임대료면
우리 애 과외를 몇 과목 시키고도 남겠다...

고무줄 늘어진 속옷이 보기 흉해 모처럼 메이커로 사다 줬더니
'무슨 속 옷을 이만 몇천원 짜릴 사?
만원에 서너개짜리 입으면 되지.'라며 핀잔주던 남편.
그럴 땐 무척이나 아껴쓰는 사람같다.

때론 구두쇠처럼 사회 활동에 쓰는 돈은 헛일이라며
자기 가정을 위해서만 사는 후배 남편이 부러울 때도 있다.

작은 부분이지만
알게 모르게 내가 기부하는 것도 모자란 것은 아닐진대
이제는 남편이 내 가정에다 기부 좀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자주 생긴다.
아마도 이 시간에 남편은 그 장애인들과 동행하여
특수학교에 입학시키러 가고 있겠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일 수 있다.'라고 늘 강조하는
남편의 취지에 호응하려면
나는 얼마나 나이를 더 먹어야 할까.
얼마나 더 도를 닦아 너른 가슴을 가져야 할까.

이 비 개고 나면
햇빛 따사로운 봄이 오면 남편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장애인 전용 아파트 만들기나 안 하면 참 다행이지.
하루속히 남편이 봉사할 일이 없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지출하다 부족하면 또 손 내밀 남편 위해
통장 잔고 확인하는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부창부수인가...

어서 날씨라도 확 개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