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한 이야기 같지만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 채변 봉투에 대한 기억은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교 생활에 서서히 적응을 해 갈 어느 봄 날.
선생님이 내 손바닥 만한 봉투를 나눠 주시며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다.
바로 채변 봉투였던것이다.
덧붙여 100% 완납해야할 의무를 가지시고 엄포 비슷한 것도 놓으셨다.
집에가서 엄마에게 보여드렸고 내 배에 신호가 오니 손을 이끌고 변소에 데려가셔서는 변소 바닥에 커다란 신문지를 깔고는 그곳에 볼일을 보게 하셨다.
엄만 능숙한 솜씨로 성냥 불로 마무리까지 야무지게 해주셔서는 담날 아침 가방에 넣어 들려보내셨다.
친구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쪽 귀퉁이를 간신히 잡아 큰 서류 봉투에 넣었다.
안 가져온 친구들은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얼마 후 선생님은 하얀 알약을 가져오셔서 노란 양은 주전자로 물을 한 가득 떠오셔 선생님 보는 앞에서 약을 먹게 하셨다.
내 기억으론 대다수의 친구들이 먹었던 것 같다.
그걸로 끝나는게 아니었다.
집에 가서 볼일을 보고 회충이 몇마리 나왔는지 숫자를 세어오라는 이상한 숙제를 내셨다
지금도 그때의 느낌은 생생하다.
약의 효과로 나온 회충은 그때 기억으로 내 팔만큼 길었던것 같다.
엄마가 신문지를 이용해 잡아 빼 주셨을 정도였으니.....
다음 날 학교에서는 번호를 부르면 "몇마리요"하고 대답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얼굴이 누렇게 떳거나 버짐이란게 피어 말이 아니었다.
비위생적인 생활의 산물이었나보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으니 위생이 무슨 대수였겠는가.
몇년 후 약이 발전을 해서 약 먹는 것만으로 끝났고, 최근 10여년 전 부터는 국민의 식생활 향상으로 인해 기생충 검사는 없어지고 말았다.
공익 광고와 더불어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박멸엔 000"하고 외치던 cf광고도 사라졌고 아이들의 얼굴도 발그레 살이 올랐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것들과 함께 잃어가는 많은 것들도 있다.
지금의 윤택함과 풍요로움보단 다같이 가난했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더 그리운건 무슨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