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니가 18개월 아이에게 생굴을 먹여 장염에 걸리게 한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12

사월


BY 베티 2000-09-15


<사 월>
나의 사월에는 아픔이 묻어있다.
4월,그건 다름아닌 내 어린시절 가운데 가장 크고 뚜렷한
점으로 각인 되어 있는 '아버지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척이나 아버지를 좋아하여 잘 따르기라도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너는 아버지 발이 닿을까봐 세 살 때부터 언니들하고 잠을 잤단다."
라고 말이다.

내 기억 속에도 아버지가 안방에 계시면 건넌방으로,건넌방으로 오시면 안방으로 숨박꼭질이라도 하듯이 피해 다녔다. 아버지께서 장에 가시거나 모임에라도 나가셔서 집에 안 계시면 숨통이 터진 듯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버지한테 가서 진지 드시라는 심부름을 내게 시키면 난 마지못해 가서는 '아버지'라는 말을 쏘옥 빼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진지 드세요.'라고 해 놓고는 잽싸게 돌아오기 일쑤였다.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 살다 가신 분이건만 끝내 난 '아버지'라는 소리로 불러보지 못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가 대부분 그랬지만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대쪽같고 무척이나 엄하게 우리를 키우셨다. 술이나 드셔야 약간의 말수가 늘 뿐, 평상시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난 그런 아버지를 마음에 품기가 무척 어려웠고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와의 틈을 매울만한 그 무엇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커 갈수록 멀어져 가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4월에 갑자기 떠나셨다. 사람이 쉽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총총해 떠나셨지만 나는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그만큼 아버지와의 사이가 남만큼이나 멀어 있었다고나 할까.더욱이 아버지께서는 항상 상위권에 있는 나의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대학에 보낸다고,날 야간고등학교에 보낼것이라고 미리 못박아 두곤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무척이나 서운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느낌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자리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자주 긴 트림을 하셨다. 식사 후에는 더욱 그랬다. 한국 전쟁시 군에서 얻은 위장병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말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변소에는 아버지가 쏟아놓은 빨간 피가 흥건히 고여 있기도 했다.
그 당시의 농촌 생활이 대부분 가난하였고 더욱이 아버지는 조실부모인데다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는 상태라서 좋은 위장약 대신 소다로 속을 달래야 했다. 그 쓰디쓴 소다를 물 한 모금 없이 그저 맨 입에 털어 넣으시고는 꼭꼭 씹어 드셨다.

그러던 어느 날.아버지는 위장병에 좋다는 한재를 사다가 달여 줄 것을 어머니께 부탁하셨다. 돌아가신 그 날은아버지와 내가 함께 논에 나가 일을 한 날이었다.어머니는 다른 집에 일을 하러 가셨다. 볍씨를 뿌린 곳을 대나무로 둥글게 꽂아 그 위에 비닐을 씌우는 작업이었다.일을 마치고 어둑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작은 솥에 손수 불을 지피셨다. 그 한재를 재탕해 드시기 위해서였다. 그걸 드시고 저녁식사까지 잘 하셨는데 다리에 힘이 좀 없으시다면서 사랑방에 가서 누우셨다. 얼마 후 화장실을 가신다며 마루를 내려오시다 그만 쓰러지더니 금새 깨어 나셨다.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쓰러지신 아버지는 아주 크게 코를 골더니 십리 밖에서 연락을 받고 온의원이 도착도 하기 전에 끝내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 나이 54세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시시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병풍 뒤의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도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한 동안은 아버지의 죽음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고 동네 어른들이 아버지 몸을 꼭꼭 묶지만 않았어도 꼭 살아나셨을 거라 믿었다.그만큼 아버지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너무 쉽게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날 드신 한재는 몸에 맞으면 한없이 좋은 약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극약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알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은 전쟁이 준 상처라고 생각한다.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위장병을 얻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그 쓴 소다로 속을 달랠 필요도 없었고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끌고 간 그 한재를 달여 드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십리 안으로는 병원이 한군데도 없어 진찰 한번 받을 수 없었던 낙후된 농촌,아니그날 응급처치를 받을 수만 있었어도 분명 아버지는 우리곁을 떠나지 않으셨을 것이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4월이 슬픔에 젖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버지의 그늘이 더 필요한 시절에 떠나셨다느 것과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 한 나머지 아버지는 꿈에 자주 나타나셨다.깨끗한 차림에 생전의 무섭고 무뚝뚝한 표정과는 전혀 딴판인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너무도 자상하게 대해 주셨다.나도 아버지께 한번도 해 본적 없는 애교을 다 부렸다.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하는 부질없는생각을 종종 한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아버지 품에 꼭 안기련다. 그리고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 '아버지'라는 말을 크게 불러보고도 싶다.사랑한다는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