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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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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채 부지런


BY ooyyssa 2003-02-05

제주도 속담에 '골채 부지런'이란 말이 있다.
골채는 삼태기를 가르키는 말인데, 공연히 힘들고,바쁘기만하고
일의 진전이 없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화산섬인 제주도의 밭에는 자갈들이 많다.

어렸을 때,어머니는 보리밭에서 보리보다 더 잘자란 잡초를 뽑고,
나와 오빠는 자갈들을 골채에 담아 밭구석에 모았다.
조그만 몸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주운 자갈들을 담아
둘이서 낑낑거리며 들고간, 골채가 쏟아 놓는 것은 자갈 몇개.
하루 종일 팔이 아프게 자갈을 날라도 밭구석에는 애기무덤만큼의
돌을 모으기 어려웠고, 다음날 밭에 가보면, 자갈들도 보리처럼
자라는게 아닌가 생각할 만큼,어린 우리의 수고는 표가 나지 않았다.

'골채 부지런'이 많은 것을 담을 수 없는 골채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골채를 들고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우리의 표나지 않는
부지런함을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골채나 골채를 든 우리의 노력에 비해 결과는 보잘것 없었다.

요즘들어 자꾸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은, 열심히 일하고 번 돈이,
떠맡게된 남의 빚의 이자로 허무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금은 두고, 이자만 갚아가는 일이 골채들고 보리밭을 헤매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는 밤10시부터 새벽 네시까지까지,
남편에게 가게까지 맡겨놓고, 어판장에서 멸치를 스트로폼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10kg 상자 500여개를 들었다 놨다하다보니,
땀이 났다.

아저씨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했다.
"돈 벌어서 다 어디 쌓아 놓을라고?"

정말 내 안에서도 그런 의문이 생겼다.
늦은 밤에 허리가 부어오르도록, 일해서 몇만원 보태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일까하고.

어쩌면, 나는 골채이고,나의 부지런함은 헛된 수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골채는 작은 양이라도 물건을 나르는게 소임이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에게 안겨진 것은 내 몫이다.

어린날 발 밑에 걸리는 돌을 다 치울 순 없었지만,
어머니는 밭일 하는 동안 조잘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심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내가 주워든 자갈 밑에 깔렸던 한 포기 보리라도
잘 자라게 했다면, 나의 부지런함도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도로 우리에게 빚을 맡겨놓은 외삼촌을 원망하며, 한숨을 쉬느니
'골채 부지런'일 망정 내가 덜어낼 수 있을 만큼 덜어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일하고자 하면,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해낼 건강함이 있으니
땀 흘려 일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어판장 바닥에 떨어진 멸치들을 그냥 버리겠다길래 모아 리어커에
싣고 집으로 가지고 왔다.
말려서 팔면, 외삼촌네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에게 신학기 책도
사줄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마리 한마리 정성들여 배 따서 말린 멸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완벽한 선물이 될것이다.

멸치 비늘 묻은 내 위로 눈이 내려 앉았다.
수없이 떨어져도 바닥에 소복이 쌓이지 않는 눈들도
지난 밤엔 '골채 부지런'만 떨었다.